현재에도 일본에는 많은 재일교포가 많이 살고 있다. 해방 전에는 최대230만 명까지도 있었다.

일제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도 있었고, 4·3 제주사건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피난으로 옮겨간 사람들도 많다. 이들 제주도 출신은 해방 후 건너간 사람들로 전체 동포의 30%를 차지하며 대부분 오사카에 거주 한다 지금은 뉴커머라 해서 유학이나 취업 또는 불법체류 등등의 형태로 일본에 살고 있다. 귀화한 30만명을 포함하면 130만명 가까운 인구수이다.

필자는 3차에 걸쳐 일본속의 코리언파워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의 우경화로 코리언들의 삶이 조금은 위축되고 고달파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려웠던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도 우리민족은 열도에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지난 세월의 영웅들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영웅탄생을 기대하면서 이글을 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인들의 일본 진출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파도처럼 이어져왔다. 동북아에서의 인구이동은 북에서 남으로 남으로 이루어졌고 그 반대의 역 이주는 매우 그 수가 적다.

어찌되었건 일본 내에는 해방 이후 많은 한반도인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남을 수밖에 없던 사정이 있었다. 비록 일본인구 1억2천500만 명의 0.5%로 200인에 한사람에 지나지 않는 수이지만 그 활약상은 대단했다.

특히 격정적인 우리민족의 특성상 격투기에서의 두각은 어쩌면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도 역도산(力道山)의 활약은 대단하다 못해 아직도 그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있을 정도이다. 그는 북한 함경도 출신으로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이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대부 격인 그는 처음에는 스모선수였다. 북한에서 생활하던 16세 때 일본 스모계 인사에 의해 스카우트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 스모계에 있어 외국인 선수로는 1호였던 셈이다. 이후 스모계에서 씨름 기술을 접목시키며 승승장구 하며 천사장사(요코즈나)의 바로 밑 단계인 오오제키(大關)까지 승급하였다. 그러나 천하장사가 되기에는 당시의 풍토에서 외국인으로서 한계가 있음을 역도산은 깨닫고 있었다.

회의를 느낀 역도산은 새로운 운동으로 눈을 돌렸으며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레슬링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영웅 역도산이 있기까지 기술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동포가 있었으니 그들은 카라테의 고수였다.

그에게 카라테(空手)를 가르친 사람은 바로 평양 출신으로 최영의보다 10세 연상이었던 나카무라 히데오(中村日出夫-한국명 강창수)란 인물이다. 그는 권도회총사(拳道會總師)로서 카라테계의 세계적 중진으로서 김신락에게 카라테를 전수하고 ‘역도산’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인물이다.

결국 역도산은 스모기술과 카라테 기술을 레슬링에 접목하여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영의 또한 대단한 인기와 유명세를 탔던 재일한국인 이었다. 그는 일본명 오오야마 마스다쯔(大山倍達)라고 할 정도로 민족주의적이었다.

성씨로 불리던 ‘배달’은 ‘배달민족’에서 이름 지은 것은 너무나도 명확하고 자신도 자랑스럽게 배달민족임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라북도 출신으로 일본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카라테 바카 1대기’라는 만화로도 그려져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최영의의 제자 문 장규(일본명 마츠이(松井章圭) 또한 일본 카라테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오랫동안 군림했다.

역도산은 살아있는 신으로서 숭앙되며 그의 제자로서는 긴 턱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이노키와 16문 킥으로 유명한 자이언츠 바바(몇 년 전 사망)가 있었고 재일한국인으로서 대동산우도(大同山又道)·백두산(白頭山)·김일(오오키 킨타로오(大木金太郞))등이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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