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미년의 새해가 밝았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이어서 날씨가 몹시 추워진다. 거창한 구호들을 내걸고 국가와 민족 그리고 인간세상 구원, 발전, 번영의 길을 외쳐대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날씨가 이렇게 한 냉할 때에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처지를 보살피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일 것이다. 이런 때에 작은 정성이나마 어려운 이웃에 대한 도움의 손길이 주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이 땅을 낙원으로 만드는 척 걸음이 될 것이다. 엄청나게 크고 많은 거액의 자선행위가 아니고 깊은 마음속에서 울어나는 자그마한 정성이라도 모이고 쌓이면 그만큼 훈훈하고 따뜻한 인간의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일찍이 “사람은 모두 남이 잘못되는 일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마음이 있다(人皆有不忍人之心)”고 했다.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게 된 상황을 문득 본 사람이 깊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하러 달려가는 것이 바로 그런 ‘보고만 있을 수 없는(不人忍)’ 착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사례로 들어 설명했다.
여기서 한 거름 더 나아가 맹자는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惻隱之心非人也)”라고 까지 단정하였고 인(仁)이 바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의 실마리가 된다고 말했다.
성선설(性善說)에 입각한 이 같은 주장에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 정반대의 견해를 피력하여 그 시비를 가리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공동체 지향적의식구조의 바탕을 이루는 덕목으로서는 현대사회에서도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있다는 데는 이의의 여지가 없을 일이다.
사람들이 한결같이 나만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데 그친다면 바로 나의 행복과 번영마저 이룰 수 없다는 점에 인간사회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 인(人)자가 상징적으로 일러주듯이 모두 상호의존의 관계에 얽혀있기 때문에 진정 내가 행복과 번영을 누리기를 희망한다면 나와 함께 삶을 같이 하는 다른 사람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여 그를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이 세상 어느 구석엔 가에 있는 한 나만이 참된 행복과 번영을 언제까지나 누린다는 게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순리를 알아야 한다. 결국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공감의 의식이며 특히 불행한 이웃을 향하는 ‘차마 견디지 못하는 마음(不忍人)’ 이라 하겠다.
어느 여류작가의 글 속에 이런 우화가 하나 있다. 평화와 행복의 파랑새 한 마리가 여름 동안 나뭇가지에 앉아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머지 않아 다가올 겨우살이 걱정도 하지 않고 평화와 행복의 노래만 부르고 있었다. 바로 인근에 들쥐 한 마리가 있었는데 날이면 날마다 보리밭과 옥수수 밭을 들락거리며 온갖 곡식을 부지런히 끌어다 곳간에 쌓았다. 하느님이 파랑새의 몫으로 지정해준 빨간 열매마저도 어느새 날쌔게 훔쳐다 쌓았다.
어느덧 여름이 가고 겨울이 왔다. 허기진 파랑새는 들쥐를 찾아가 자기 몫이던 나무 열매 한 알만이라도 돌려달라 간청을 하였지만 들쥐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파랑새는 마침내 날개를 접고 죽고 말았다. 반면, 들쥐는 곡식이 가득 찬 곳간에서 배불리 먹고 마시며 뒹굴었다. 파랑새가 죽자 그의 노래 소리가 멎을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들쥐는 이상한 공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들쥐는 늦게 서야 비로써 들쥐의 노래가 평소 주던 참뜻을 알게 되었다. 들쥐는 무척이나 쓸쓸한 삭막감을 느꼈다. 어떻게 해서라도 파랑새의 노래 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들쥐는 점점 식욕을 잃고 쇠약해졌다. 곡식이 잔뜩 쌓인 곳간에서 마침내 전신쇠약증으로 죽고 말았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그 동안 들쥐의 철학만을 지나치게 숭상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일과 그른 일, 가야 할 길과 가지 못할 길을 가리지 않고 그저 곳간을 채우고 재산을 쌓는 데만 혈안이 되어 왔다.

악착같이 벌어서 남보다 많이 갖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요 영광의 기반이라는 의식구조 때문에 우리의 삶이 한층 치열한 아귀다툼의 양상으로 바뀌고 그만큼 냉혹해졌던 것이다. 인간은 먹지 못하면 죽는다지만 또한 노래에 굶주려도 죽는 수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 차원의 묘미가 있다.
정말로 아름다운 충북, 청주가 되기 위해서는 들쥐의 철학만이 압도하는 풍토여서는 안 된다. 파랑새가 날개를 접고 죽지 않도록 이웃에 대해 세심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분위기가 가꾸어져야 한다. 거창한 구호나 외침보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살피는 일에 보다 큰 관심을 갖자. 엄동을 이웃 사랑으로 녹이자. (청주대학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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