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말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특히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를 둘러싸고 소위 이땅의 먹물들끼리 양편으로 갈라져 토론의 장이 아닌 논쟁의 격화로 치닫고 있는 그 배후에는 정치인과 그 집단의 정략과 당리당략이 교묘히 배합돼 사회전체를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양극구도로 몰아가고 있는 양상이다.

우리가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않음은 인정해야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좀 더 나아지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말문과 의사표현을 막으려는 큰 목청의 제압이 횡행하는데 대해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토론보다는 논쟁과 논란이 더 익숙하고 대화를 통한 일치(consensus)를 이끌어내기 보다는 과정(process)은 생략하고 결과(result)를 만들어 놓고 따라오지 않으면 이념적으로 매도해 버리는 일들이 오피니언 리더들의 집단에서 비일비재하다.

추미애 의원의 취중발언에 대한 갑론을박이 그렇고 이문열과 황석영이라는 대표문학인들의 충돌도 자칫 흑묘백묘(黑猫白猫)론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닌지, 또 황장엽씨 방미초청을 둘러싼 여야간의 말싸움은 극과 극으로 치달아 이제 색깔론이니 뭐니 하는 귀에 익은 단어까지 다시 등장해 국민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논쟁과 논란의 와중에 분명한 것은 갈수록 험구가 되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지만 요즘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말씀은 가히 조폭수준에 버금간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가고 있는 것 같다.

하기야 자기입 가지고 하고 싶은 말 하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없지만 적어도 공인이라는 사람들이 앞 뒤 안가리고(혹은 치밀히 계산된 수사법인지는 모르지만) 쏟아내는 언어의 폭력 때문에 그것을 일일이 활자화시키기도 힘이 들고 독자들에게 전달하기도 민망해진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무한한 말싸움이 벌어지는 사이버공간에서의 내편 네편 가르기는 말만 대화방이고 토론방이지 그야말로 싸움(爭)터로 변해 살벌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소신껏 자기의견을 펴면 반대편들이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정도의 표현을 자유롭게 구사해가며 무차별 공격을 하는 통에 홈페이지를 폐쇄하는 반민주적인 일들이 발생하고 공개된 공간에서의 의견 피력도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수구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까지 들먹이는 것은 대화와 토론이 우선되는 선진 민주국가의 패러다임과는 거리가 먼 행태이다.

교수들로 대별이 되는 식자층과 논객들이 자기와 의사를 달리하는 패거리의 공격이 무서워 (더러워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필봉을 잠시 접으려고 하는 징후는 우리 사회의 언론을 왜곡시키고 건강한 토론문화를 키우는데 최대의 장애물이다. 민주사회일수록 다양성이 강점이 되는데 우리는 지금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스스로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역과 관련 최근 충주경찰서 모 경찰관이 상관을 비하했다고 징계를 당한데 대해 부산의 동료 경찰관이 이를 비난하자 조직기강 문란 등 이유로 파면된 것을 두고 경찰청 게시판이 찬반 양론으로 시끌시끌하다.

‘파면취소를 해야 한다’와 ‘조직기강 확립 위해서는 당연하다’는 양분된 시각이지만 시정잡배만도 못한 언사는 잘 보이질 않는다. 일반적 경찰의 이미지와는 약간 다를 수 있지만 그야말로 생각의 자유를 글로써 표현하는 것은 수준이하의 말장난을 즐기는 정치인들이나 얼굴없는 폭력을 조장하는 무리들과 비해 신선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의 서사시인인 헤시오도스는 그의 작품 ‘일과 나날’에서 ‘조심성 있는 혀는 최대의 보물이며 사리판단을 할 줄 아는 최대의 기쁨이다’라고 설파했다. 이 세상에서 세치 혀를 잘못 놀려 패가망신한 사람의 숫자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인데도 지금 역시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는 자숙의 모습은 여전히 보기가 힘들다.

말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말을 너무 함부로 하며 욕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 그래서 토론문화는 위축되고 건전한 논쟁보다 죽기살기식 욕설이 판을 치고 있으며 어느새 그러한 환경에 익숙해져 있음을 알고 스스로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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