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프 랭아·90마일 비치
좁고 기다란 지형 이룬 곳

여유롭지 못한 일정으로 매일 아내와 한 번씩의 전쟁을 하는 것 같아 일찍 서둘렀다. 8시 40분 홀리데이 파크를 나서며 132km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양떼와 검은 소떼는 벌써 우리에서 나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도로의 물기가 운전에 긴장감을 주어 초원의 풍경을 감상할 여유도 없다. 

아와누이(Awanui)를 지나면서 파 노스(Far North) 지역으로 들어간다. 파 노스 지역은 뉴질랜드의 최북단 지역으로 테즈만해와 태평양을 가르는 케이프 랭아(Cape Rainga)와 90마일 비치(90Mile Beach) 일대를 말한다. 좁고 긴 지형을 이룬 이곳은 세상의 끝으로 달려가는 기분이다.

북쪽으로 올라가며 길이 굴곡져 아이들이 멀미를 한다. 중간 중간 바람을 쐬며 달려간다. 드넓은 초지가 나타나더니 측백나무 비슷한 나무로 뒤덮인 산이 이채롭게 펼쳐진다. 점점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가 싶더니 케이프 랭아에 도착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끝에 하늘이 맞다아 있다. 바닷바람이 시원스레 몰려온다, 탁 터진 공간에서 하늘과 바다가 처얼썩 만남의 박수 소리를 내어준다. 사람이 사는 공간의 끝자락에 등대가 보인다. 주차장에서 10분 걸어 내려가니 뉴질랜드 최북단의 등대가 외롭지 않게 바다를 응시하고 서 있다.

‘영혼이 시작되는 곳’ 케이프 랭아 등대는 테즈만해와 태평양해가 만나는 중앙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다. 테즈만해의 거대한 파도는 이곳에서 태평양과 만나며 새색시처럼 잔잔한 물결의 파도로 변한다. 서로의 바닷물이 충돌할 때는 파도가 10m도 넘는다고 한다. 많은 관광객들이 신비한 바닷물의 조우를 바라본다. 이곳에는 세계 주요 도시와의 직선거리를 이정표로 만들어 놓았는데 우리 서울은 이름이 올라있지 않았다. 윤지는 “왜 우리나라는 이정표에 올라있지를 않은 거야?”하며 속상해 한다. 빨리 서울이든 청주든 이정표에 올라가길 기대해 본다. 화창하고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니 이곳에 머물고 싶다. 한편의 책을 읽고 한편의 시를 쓰고 싶다. 우리는 그곳에 영혼이라도 머물게 하늘 높이 뛰어 올라 온몸을 하늘의 품으로 던져본다. 하늘에 오른 우리는 구름을 타고 테파기로 향했다.

테파기(Te Paki)는 면적만 7㎢ 에 달하는 거대한 모래 사구인 자이언트 모래언덕(Giant Sand Dunes)이 있다. 이 모래 언덕위에 올라서면 사구와 숲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며 묘한 흥분과 기쁨을 준다.

모래 언덕위에는 바람의 향방을 알 수 있는 모래 탑이 형성되어 있고 바람결을 따라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정상부위는 조개껍데기가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곱게 갈리어 올라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래 능선에 족적을 남기고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다. 준비한 비닐을 깔고 미끄럼을 탔다. 준비해온 샌드보드를 가지고 신나게 즐기는 이들이 여기저기 많다. 우리 가족만이 비닐을 이용하는데도 그저 즐겁기만 하다. 기저귀를 차고 타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한바탕 폭소가 이어졌다.

그 아래에는 유리보다도 투명한 테파기강이 흐른다. 이곳에 발을 담그던 형빈이가 “아빠 빨리 와봐! 발이 이상해”하는 것이다. “왜 그래”하고 소리치니 “모래가 발을 잡아먹어”하는 것이다.

물살이 흐르며 발목을 스쳐가는 물길이 모래를 이동시켜 발이 들어가는 형태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나 또한 아들 옆에 서 있자니 고운 모래가 발을 감싸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가볍게 잡고 있는 모래손에서의 발을 살짝 잡아 빼어 와이파파카우리 램프(Waipapakauri Ramp)의 90마일(90 Mile Beach) 비치로 향했다.

거친 파도가 해안의 모래사장에 와서는 개구쟁이 꼬마의 미소처럼 잔잔한 파도를 이루며 해안선을 만들어 낸다. 그 속에서 고운 모래는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교차하며 끝없이 길게 펼쳐진다.

하루를 밝게 장식한 햇빛은 수평선과 조화를 이룬 구름 띠를 선홍빛으로 색칠해 환타지를 연출한다. 그 장엄하고 황홀함은 파도에 실려 바람따라 우리의 가슴속 깊이 들어온다. 그 바람은 세속의 때를 깨끗이 쓸어버리고 신선한 기운만 남긴다. 우리 모두 심장이 멈추는 황홀경에 빠질 즈음, 세속에 물들지 않은 형빈이는 낙조 속으로 정신없이 빨려 들어간다.

그 사이 아내는 모터싸이클과 짚을 가지고 온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더니 나를 부른다. 그들은 모터싸이클을 내게 주며 타보라 권한다. 그들에게 운전 방법을 배우고 형빈이를 뒷자리에 태워 해변을 누비니 가슴속에 남아있던 모든 응어리가 파도의 포말처럼 잘게 부서져 바람 속으로 날아가 흩어진다. 그동안 배운 아내의 유창한 영어회화 덕에 90마일 비치에서 질주의 본능을 맛보았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데 “근처에 그들의 집이 있다”며 우리를 초대하겠다고 한다. 선뜻 초대에 응하고 헤어져 홀리데이 파크로 돌아와 망설이다가 ‘기다리면 어쩌지?’싶어 그들이 설명해준 곳으로 길을 나섰다. 준비한 선물도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이 실례이다 싶지만 어쩌겠는가? 어두운 밤길에 차까지 빠지는 위험천만한 고생을 하고 나서야 그들의 집을 찾았다.

정말 반갑게 맞이해 준다. 방학을 맞아 방문한 조카까지 그 집안에 있는 사람만 10명. 우리까지 14명이다. 조그만 집이 갑자기 이방인인 우리로 인해 북적북적하다. 마오리족의 후손들이라는 그들은 연실 즐거운 모양이다.

맥주를 마셔 취기까지 오른 그들은 가족 앨범까지 보여주며 행복해 한다. 부엌에서는 우리에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느라 안주인인 스테비(Stevie)가 정신없이 분주하다. 부족한 언어지만 마음으로 통하고 단어로 소통을 한다. 전복과 굴이 전체 요리로 올라오고 또 다른 전복을 “여행 중 요리해 먹으라”며 선물로 내어온다. 흑전복스프, 샐러드, 빵, 고구마까지 우리 입맛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낯선 마오리 가족이 우리를 납치하면 어떻게 할 거냐”며 걱정하며 불안한 눈빛으로 “빨리 돌아가자”고 보채던 형빈이는 어느덧 그 집 아들인 와이타이아(Tj Waitaia)와 장난감을 가지고 같이 놀더니 편안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의 뜻하지 않은 만남, 그리고 초대! 이 모든 것이 뉴질랜드를 몸으로 체험하며 느끼려던 우리 가족에게 주는 하늘의 선물 같았다. 스테비는 아내에게 더블 트위스트 도자기(8자가 하나 더 꼬아진 도자기)를 선물했다. 이는 서로가 하나이며 영원이 변치 말자는 우정의 상징이란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마오리식 전통인사인 홍이(Hongi)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홍이 인사는 서로 악수하면서 코를 맞대며 하는 인사이다. 서로 코를 맞대며 상대의 영혼과 자기 영혼이 교감을 이루어 평화와 삶의 번영을 나타내는 의미다.

또 로의 호흡이 섞여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평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서로 코를 맞대며 진실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게 됐다.   글·사진 박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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