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 생각의 자유란 무한한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유·불리로만 따지자면 반전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마음을 먹든 그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만큼 불가능도 없으며,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만큼 우주처럼 광대한 장이 펼쳐질 수 있는 것이 생각이다.

반면 어떤 유형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떤 완력으로도 열 수 없는 비밀의 공간 같은 단단함도 갖고 있고, 아무것도 없는 듯한 작은 공간의 무게는 그 어떤 것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무거움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도 생각이기도 하니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 도무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기쁨과 슬픔, 추함과 아름다움이란 가치도 결국 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지난 기억이나 현재의 감정 상태가 반영되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결정하고 그 결과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생각의 한 단면이다. 어떤 이에게 슬픔이 내게는 기쁨일 수 있고, 어제의 평안한 음악이 지금의 좌절과 절망 속에서는 소음처럼 들려질지도 모를 일이다.

일반인들의 시각으로 강박증후군 상태의 사람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작은 일에 집착하는 행위,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사고, 소소한 것에 비치는 지나친 걱정과 망상들을 보게 되면 기실 우리는 이해할 수없는 그들의 행동에 아연실색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 크기와 무게는 우리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고, 어쩌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픈 관념들이 소용돌이처럼 커지며 그 사람을 질식시켜 가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고 다음 물음에 답해보라. 과연 어디까지를 강박증이라 할 것인가?

이렇듯 생각은 내 스스로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힘을 음(陰)적인 것과 양(陽)적인 것으로 대별할 수 있을 만큼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래서 긍정적 생각이 긍정적 가치를 만들어내고 긍정적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한다는 말에 매우 공감한다. 그러나 반드시 가치라는 개념을 다른 사람들이 나를 판단할 때의 기준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내 마음에 근간을 둬야 한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나의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은 누구나 한다. 흔히 말하는 ‘스펙’이란 단어도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일련의 것들을 뭉뚱그린 말로 써먹을 만큼 보편화된 신조어가 됐다.

나 또한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해온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최소한 학창시절에는 성적의 향상이 나의 가치제고를 위한 필수요소로 인식하며 보냈고, 도덕적 친절과 완벽한 일처리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혹은 내 스스로 설정한 가치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어떤 것도 본래의 내 가치에 기준한 것이 아닌 타인이 나를 판단하고 저울질 할 때 좀 더 우위의 나로 판단하고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가치충족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긍정적 삶이나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는 의미가 타인을 의식하기 앞서 내안에 나를 만족시키는 것에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학에서 말하는 플라시보효과도 이런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긍정적 생각만으로도 건강한 정신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듯한 생각이 우리 정신세계에서는 폭풍우 같은 변화고, 창조의 근간이다. 그래서 더 많은 내 의지대로의 생각과 가치창조가 이루어질 때 우리 정신과 몸이 건강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로 회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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