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성했던 겨울이었다. 조금 추위가 풀어지는듯하다가 또 기온이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아직 봄은 멀었는지 오늘도 바람이 세다. 채 눈을 털어내지 못한 나뭇가지가 마구 흔들린다.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산책길에 나선다. 계절의 진리는 어김이 없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뺨에 닿는 바람이 겨울처럼 앙칼지지 않다. 공짜선물 받은 아줌마처럼 헤벌쭉 마음을 풀어놓았다.

무심천 산책로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걷고 달리며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청주에 사는 사람치고 무심천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만은 내게 있어 무심천은 童心이다. 무심천 주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 언제나 고향을 느끼게 해준다. 산책로를 걸으면서 지난 자취를 더듬어본다. 이쯤에서 어머니는 빨래를 하셨고 나는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송사리와 모래무치를 잡아 가둬 놓고 어머니의 빨래가 끝나기를 기다렸었다. 얼음배를 타고 까치내까지 갔다 왔다는 오빠를 기다려 젖은 옷을 말리던 곳이기도 하고 비료 부대를 깔고 앉아 잔디썰매를 타고 내려오던 둑은 이쯤이리라. 

無心, 無心이라는 부정적인 느낌을 사람들은 말한다. 무심천의 유래비를 보면 정말 무심한 하천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미가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사이에 아기는 물에 빠져 죽었는데 강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심히 흘러가기에 무심천이라 이름하게 되었단다. 오늘처럼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여덟 살 때인가 동무들과 하릴없이 무심천을 휘젓고 다니다가 물속에 거꾸로 처박힌 작은 아기의 시신을 본적이 있었다. 집으로 혼비백산 달려와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늘 탓을 하셨다. 하늘 탓인지 강물 탓인지 잘 모르겠으나 무심한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무심하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삶과 죽음, 복과 화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마음 비우지 못하고 아등바등 사는 우리네에게 묵묵함을 일깨워 주려함은 아닐는지. 하찮은 것에 마음을 두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

속도를 내지 못하고 천천히 걷는 사이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더 늘었다. 아직 바람이 찰 텐데 자전거를 타고 씽씽 달리는 가족의 모습도 보인다. 무심천 산책로와 휴식 공간이 시민의 마음을 푸르게 가꾸고 있다.

조금만 기다리면 벚꽃 만개하여 구름동산을 만들겠지. 삼삼오오 몰려나와 환한 웃음꽃도 피우겠지. 아직은 푸른 이끼를 덮어쓴 개울바닥도 점점 맑아져 반짝이는 모래와 자갈의 순한 노래를 들려주겠지. 친구들과 찬 강물에 발 담그고 놀았던 징검다리를 누가 부수고 반듯한 타원형의 콘크리트 다리를 놓은 것일까. 매력 없는 저 다리대신 뒤뚱거리고 아슬아슬하지만 예전의 그 징검다리를 놓아보고 싶다.

강가에 앉아 아직 추워서 나오지 못한 왜가리를 기다린다. 저 큰 바위 위에 서서 늘 먼 산을 바라보던 그 녀석. 오늘은 날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언제나 내게 따스한 추억과 푸름을 가슴 가득 담아주는 무심천은 결코 무심하지만은 않다. 내게 베푼 것들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해한 것들을 원망하지 않으며 묵묵히 북으로 북으로 물길을 잡을 뿐이다. 무심하게 훑고 지나가는 바람도 무심히 흐르는 구름도 모두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리라.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걱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無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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