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6학년 무렵, 저녁밥을 먹고 나면 곧장 극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우리고을에 하나밖에 없는 극장은 큰댁 형님이 운영했기에 언제든 맘대로 들락거릴 수 있었다. 오락거리가 별로 없던 50년대에 하룻밤 한 번 상영하는 극장은 꽤나 인기가 있었다.

극장 지붕 꼭대기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군민 여러분! 저녁 진지 일찌감치 드시고 문화의 전당으로…” 라는 멘트와 함께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대략 55년 전의 일인데도 어제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그 시절 귀에 익은 노래가 꽤 남아 있다.

특히 나애심씨가 주연 겸 주제가를 부른 영화 ‘백치 아다다’는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있고, 그래선지 나씨의 노래를 좋아 했다. ‘미사의 종’이라든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같은 노래들은 지금도 부를 수 있다.

당시 극장에서는 영화 외에도 여성국극단이나 신파악극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하루는 1부에서 악극을 하고 2부 순서로 버라이어티 쇼(Variety Show)를 보여줬다.

생전 처음 쇼를 구경하고는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뿔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날 아버지께서 내 뒤를 밟아 극장에 오신 것이다.

하루가 멀다고 저녁만 되면 밖으로 나도는 자식이 뭣에 정신이 팔렸는지 걱정이 되신 게다.

나중에 집안 형님께 들은 바로는 2부 쇼에서 젊은 처자들이 넓적다리를 드러내놓고 번쩍번쩍 쳐드는 춤을 보시고는 못마땅해서 나가셨다는 것이다.

살그머니 삽짝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학생이 공부는 뒷전이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어쩌겠느냐는 질책이시다.

요즘에야 넓적다리 내놓는 것이 자랑인 세상이지만 당시엔 ‘19금’에 해당하는 쇼 구경에 정신이 팔린 어린 자식의 장래가 걱정되신 것이다. 그래도 변명이랍시고 숙제는 다 하고 나다닌다는 자식에게, 그런 요량이라면 교과서 말고도 책을 많이 읽으라는 말씀이 떨어졌다.

다음날 곧장 서점에 가서 월간잡지 ‘학원’을 사들고 왔다. 전에 보던 만화책보다 훨씬 더 재미가 있었다.

문제는 한달음에 다 읽어 치우고 나면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했으니 너무 심심했다.

그래서 자주 서점에 가서 책을 사기도 하고, 남의 것을 빌려다 읽기도 했다.

 점차 만화책이 흥미가 없어질 때 쯤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고향보다 훨씬 큰 고을에 나오니 서점도 여러 곳이고 무엇보다도 대본소가 있어서 적은 비용으로 책을 빌려다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마도 한 주일에 책 한 권 정도를 사서 읽었고 거의 사나흘돌이로 대본소 책을 읽으면서 독서의 재미에 빠져버렸다. 때론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책도 있었지만 책 속의 사진이나 삽화를 보면서 대충 짐작으로 보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 온갖 것이 다 들어 있다는 선인의 말씀도 점차 이해가 됐고, 책을 저술하는 엄중함도 깨닫게 됐다.

그러면서 나도 누구 못잖은 필생의 작품 한 권 쯤은 남겨야겠다는 허황된 꿈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숨이 살아있는 날까지 읽고 또 읽다보면 혹시 모르겠다.

학창시절에 책만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극장에 정신이 팔렸다가 아버지의 훈계로 돌아 선 독서는 이후 내 생활의 일부가 됐고, 이제는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을 습관으로 굳어버렸다.

다행하게도 부모님께서는 내게 좋은 눈을 주셔서 매일매일 아무리 읽어도 피로한 줄 모르니 독서생활에 어려움이 없다.

전국일간지와 지역일간 및 주간신문 각 하나씩 그리고 웹진을 보는 한편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간을 고르는 재미를 어찌 멈추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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