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생각 (7)
동무생각 (7)
  • 충청매일
  • 승인 2012.02.2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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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문교회에 세워진 박태준 찬송가비.

한국 음악계의 선구자                 

작곡가 박태준은 1900년 11월 22일(음력) 대구 중구 동산동 72에서 태어났다. 대남(大南)소학교를 거쳐 미 장로교에서 경영하는 계성학교를 1916년 졸업한 뒤 평양에 있는 숭실 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계성학교에 다닐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숭실 전문학교에 진학해서는 음악을 전공하고 졸업 후 1921년부터 23년까지 마산의 창신학교에서 1년반 동안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창신학교 재직 중 1922년 작곡한 것이 ‘동무생각’이다. 어느날 해변을 거닐다 악상이 떠올라 집에 돌아와 오선지에 옮겼다고 한다. 처음 제목은 사우(思友)였다. 해방이 되어 중·고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사우’는 우리말로 풀이되어 ‘동무생각’이 되었다. 처음 마산에서 불리기 시작하면서 삽시간에 젊은이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일제 치하에 우리말 노래가 별로 없어 노래에 대한 갈증이 크던 시절이었다.

박태준은 이후 모교인 계성학교에서 영어와 음악교사로 초빙받아 8년간 근무했다. ‘동무생각’을 작곡한 2년 후인 1924년 윤극영의 동시(童詩)에 곡을 붙인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으로 시작되는 동요 ‘반달’이 나왔고 1년후인 1925년 ‘오빠생각’이 탄생했다.  

그 뒤 숭실학교의 말스베리 교수에게 1년간 대위법과 화성학 등을 사사한 후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난다. 그가 도미하게 된 것은 숭실학교 교장으로 있던 매큐인 목사가 테네시주에 있는 터스칼럼 대학의 스칼러십을 얻어 가게 되었다. (한국 가곡사, 13~14쪽, 김점덕, 과학사, 1989)

그는 이 대학을 1년만에 마치고 1933년 음악대학인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음대에 들어가 합창음악을 공부하여 졸업한 후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그는 곧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갔으나 1년 반쯤 후 신사(神社)참배 문제가 일어나 1938년에 학교가 폐교되는 바람에 다시 대구로 내려가 계성학교에서 4년간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그는 일본 패전 말기 미국 유학을 갔다 왔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대에 잡혀가 두어달 갇혀있다가 서울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는 해방 후 1946년 경성여의전(京城女醫專) 교수로 있다가 1948년 연세대로 옮겨 1974년까지 26년간 근무했다. (후반 8년은 음대 초대학장으로, 정년 퇴임 후엔 특별강사대우로 있었던 것) 박태준은 1952년, 미 우스터 칼리지(Wooster College)로부터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를 떠난 후 그는 큰 아들이 있는 미국에 잠시 다니러 갔다가 건강 악화로 위를 3분의 1이나 잘라내는 수술을 받고 8년간 미국에 머물렀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1986년 10월 20일(양력)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한국음악협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일산 기독교 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남대문교회에 세워진 박태준 찬송가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박태준은 널리 불리는 찬송가 ‘나 이제 주님의 새 새명 얻은 몸’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이 찬송가는 이호운(1911~1969)목사의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다. 그는 서울 남대문교회 집사로서 성가대를 28년간 지휘했다.

남대문 교회에서는 2011년 11월 20일 ‘박태준 박사 탄신 111주년 기념 예배 및 찬송가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박태준이 작곡한 주요 노래들의 제목이 적힌 흰색 철제 조형물과 함께 세워진 이 찬송가 비에는, 앞면에 “나 이제 주님의 …” 악보가, 뒷면에는 개인 약력이 새겨져있다. 그는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으나 자녀들 중에 음악의 대를 이은 이는 없다. 현재(2012년) 남대문 교회에는 그의 막내 아들 박문식 집사가 다니고 있다.

그는 가곡, 동요, 찬송가, 교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연세대 교가와 제헌절 노래도 그의 작품이다. “대은암 도화동 이름난 이곳…”으로 시작되는 필자의 모교인 경복중고등학교 교가에 곡을 붙인 이도 박태준이다. 해방 후 일제 때의 일본어 교가 대신 우리말 교가를 새로 지을 때 가람 이병기 선생이 가사를 쓰고 박태준 선생이 곡을 붙여 만들었다. 그는 한국 음악계의 기초를 다진 선구자였다.        <끝>

이정식(언론인·뉴스1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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