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캔디에서 만난 구두 수선공

아시아 중에 서구 열강의 소용돌이에 휘둘리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을까.

인도나 스리랑카도 대표적인 희생국가였다. 특히 스리랑카는 그 역사를 보면 어처구니없다.

아주 오래전 스리랑카 땅에 침입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운 이들은 인도 북부지역 신할리족들이다.

이들의 세력이 왕국을 건설하고 스리랑카를 지배하고 있던 때 새롭게 인도의 남부 타밀나두주 사람들이 쳐들어와 스리랑카 북부에 따로 왕국을 설립할 만큼 세력이 막강해 졌다. 이렇게 두 민족의 대립과 갈등은 스리랑카 역사 자체이며 깊은 골을 만들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두 민족은 인도 땅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

결국 뿌리가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며 수많은 인명피해, 해외 도피 등을 양산하며 스리랑카를 불우하게 만들어온 것이다. 이런 갈등은 19세기 서구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면서 마지막 지배자 영국 식민지 시절에 극대화 되었다.

스리랑카가 영국으로 부터 독립한 후에는 우리나라 경우처럼 정치적인 격변을 거치며 수많은 내전을 치러야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근 표면적으로는 진정된 듯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여행중에도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에는 스리랑카군과 타밀나두 반란군과의 충돌을 담은 사진을 전시하며 인도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는 내용의 전단지를 수없이 보았다.

아직 인도 남부 출신의 타밀나두주 반군과 신할리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스리랑카를 인도의 눈물이라 부른다. 스리랑카 지도가 마치 인도 땅에서 눈물을 한 방울 흘린 것처럼 생긴 것도 이유지만 수많은 인도 후예들이 또 다른 땅에서 동족끼리 목숨을 빼앗는 전쟁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가 결코 남의 나라 같지 않다.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스리랑카 캔디 시내거리에서, 구두 수선공 S. 구루사미(60)를 만났다. 한국에서 사신고 온 신발이 늘어나 자꾸 벗겨져 걸음을 걷기 불편한 지경에 이르러 그 신발을 수선하기 위해 들른 것이다. 거리에는 몇 개의 구두수선집이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구루사미가 수선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테리와 나는 신발을 맡겨놓고 심심하니 앉아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어가 안되는 구루사미는 우리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주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안타가워 했다. 앞의 노점상 젊은 총각에게 뛰어가 우리 말을 전하고 그 청년이 구루사미에게 스리랑카어로 얘기해 다시 우리에게 전하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몇 차례 그 일을 반복하니 우리는 오히려 구루사미에게 미안했다. 시간을 많이 빼앗고 일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더 이상 그에 대해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이 못할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그의 일터에 쪼그리고 앉아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그가 일하는 손을 보았다.

헐렁해 자꾸만 벗겨지는 신발에 그는 밑창을 한 장 더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밑창에 접착제를 발라 붙이는데, 그 접착제를 손으로 바르고 있었다. 손에 달라붙는 접착제를 어찌 감당하려고 그것을 손으로 일일이 바르고 있는지.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밑창에 접착제를 바른 후 오른손에 달라붙은 접착제는 왼손가락을 이용해 뜯어냈다. 그 작업이 엄청 미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바르는 도구를 만들어 놓으면 손에 묻히지 않고 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7년을 했으면 그만한 노하우쯤은 있어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어떤 노하우도 그에겐 없어 보였다.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그는 구두를 수선하고 있었고, 낡아 터진 곳은 다른 가죽을 덧대 손바느질로 꿰매고 역시 접착제를 이용해 붙이고. 그것이 전부였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라고 했다. 하지만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 아니라 모태라는 생각을 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나 역시 후자의 논리를 따른다.

육체를 영혼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생각은 사람이 사유하는데 이런저런 육체의 욕구들로 인해 방해가 된다고 천박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의 결정적인 순간에 육체의 건강함이나 육체의 운동이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늘 경험한다.

특히 손의 움직임을 보면 손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결국 두뇌가 만들어내는 사유와 육체 사이에는 늘 손의 역할이 있다.

손은 정신과 육체를 잇는 다리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손이 움직일 수 있어 마음도 몸도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을 늘 보고 느낀다.

구루사미의 손이 얼마간의 시간동안 끝없이 움직였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 당연히 그의 생각이며 마음도 움직였으리라. 수선을 마친 신발을 내게 내밀어 그것을 받아 신었을 때 그 편안함이라니. 손이 움직이는 동안 그 안에 그의 정성을 담은 그의 마음이 함께 움직였다는 증거일 테다.

그가 37년을 한결같이 해온 일이다. 그 손으로 그는 두 아들을 학교에 보냈고 가족들을 부양했다. 순간 나는 무안했다. 그에게 미개하다는 생각이나 노하우 운운한 내 모습이 한 없이 부끄러웠다.

늘 편하고 쉬운 길만 가려고 잔머리를 굴리며 살았지, 평생 동안 누군가를 이토록 편안하게 해준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래. 나는 그랬다. 누구보다 빠른 길을 가고 싶어 했고 누구보다 편안한 길을 가고 싶어 했다. 힘들고 어려우면 포기하고 돌아서고 더 쉬운 길을 찾아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이 자리였다. 아무것도 아닌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구보다 앞서 가지도 못한 채 늘 이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좀 더 쉽고 빠른 길을 골라 살아온 나는 이 거리 스리랑카 캔디에서 자유롭고 싶다고, 변화를 주고 싶다고, 진보하고 싶다며 떠들고 다니는, 허상만을 쫓고 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혼돈스러웠다.

무엇이 진정한 자유로움이고 무엇이 진정한 변화고 무엇이 진정한 진보인지, 모든 것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버린 듯 했다. 어쩌면 애초부터 내게는 분별력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어느 것을 바라봐야 할지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테리가 돈을 지불하고 가자고 몸을 툭 쳤다. 많은 시간을 빼앗았으니 기본적으로 내는 20루피 보다는 더 내줘야 할 것 같았다.

지갑을 여니 100루피짜리 지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돈을 내밀고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우리는 구루사미에게 이튿날 살이 부러진 우산을 들고 가 수선을 했고 그리고 또 이튿날 시내에 나갔다가 다시 들렀고, 그 후 캔디를 떠난다는 인사를 하러 또 들렀다.

머리가 하얗게 센 구루사미는 가족으로 두 아들과 아내가 있다고 했다.

거리에서 구두 수선공으로 일한 것은 37년이 되었다고 하니 청년시절 부터 평생을 해온 셈이다.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거리의 좁은 공간에서 구두와 우산을 수선하는 구루사미는 하루에 스리랑카 루피로 600∼1500루피를 번다. 신발 한개 수선하는 비용은 20루피 정도다.

갈 때마다 보게 되는 초록색 가방이 있었다. 집에서 싸준 도시락 가방이었다. 그 안에는 간식으로 먹는 바나나도 잊지 않고 꽂혀 있었다. 그가 하루 동안 일용할 양식인 셈이다.

복잡한 길 한 켠에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을 차지하고 생업을 이어가는 구루사미의 손은 참 편안하고 안정돼 보였다. 빠르게 하려고 서두르지도 않았고 손에 접착제를 묻히지 않고 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평생 같은 방법으로 해왔고 앞으로도 그는 그 방법으로 구두 수선을 할 것이다. 그

가 자유니, 진보니, 변화니 하는 세상의 잡것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나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 자리를 떠나는 발걸음에 옅은 한숨이 나왔다.          

 글·사진=김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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