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도기념관에 그려져있는 설도와 춘망사 제4수.(왼쪽) 망강루 공원안에 있는 설도의 묘.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가곡 ‘동심초(同心草)’의 원본인 한시(漢詩)가 여류시인 설도(薛濤)의 춘망사(春望詞,) 4수중 제 3수라는 것은 이미 이야기했다. 그런데 1943년에 김억 시인(김소월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이 번역해 발표한 춘망사1, 2, 3, 4 수를 보면 어찌된 일인지 마지막 4수의 내용이 원본과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본란을 통해 지적한 바 있는데, 이번 사천성 성도 망강루 공원내의 설도기념관 방문을 통해 원본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앞서 본란에서 망강루 공원에 대해 조금 설명했지만 공원내, 설도가 종이(설도전)를 뜨던 우물인 설도정(薛濤井) 옆에 자리잡은 설도기념관은 3면을 설도의 시와 상상속의 젊은 여인 설도를 그린 그림 등으로 채워져 있다. 이 가운데 ‘춘망사’ 제 4수도 적혀 있다. 제 4수를 이 시의 대표적인 부분으로 여기는 듯 했다. 아쉽게도 그림 속에 ‘동심초’의 원본인 제 3수는 보이지 않았다.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 어찌할까 꽃 가득 핀 저 가지

 翻作兩相思(번작양상사) 생각할수록 그리움만 가득하여라

 玉箸垂朝鏡(옥저수조경) 눈물이 아침거울에 떨어지네

 春風知不知(춘풍지부지)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 ‘춘망사’ 제 4수 - (일반 번역)

 

그런데 김억은 여기에 ‘봄바람’이라고 제목을 붙여 다음과 같이 번역시를 발표했다.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 가지마다 가득이 피인 꽃송이

飜作兩相思(번작양상사) 이 상사 풀길 없어 쉬는 긴한숨,

玉筋乘明鏡(옥근승명경) 거울속에 비최인 세인 이머리

春風知不知(춘풍지부지) 휘도는 봄바람야 어이 알으리.

 - 김억의 번역시 ‘봄바람’ -

 

한시 원본과 달리 김억의 번역시집에는 제 4수 2행 ‘번작양상사’의 번(翻, 원본)이 번(飜)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채자(採字)과정에서의 실수로 빚어진 오자(誤字)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3행도 그의 시집엔 ‘옥근승명경(玉筋乘明鏡)’으로 나와 있다. 번역 내용도 본문과 전혀 다르다. 왜 한자가 그렇게 바뀌었는지 이유는 알길이 없다. 다만 원본대로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마침내 교서(校書)가 된 설도

또한 궁금한 것이 설도묘에 쓰여져 있는 묘비명이었다. 이번 방문에서 확인해 보니 ‘당여교서설홍도묘(唐女校書薛洪度墓)’라고 적혀있었다. 홍도(洪度)는 설도의 자(字)다. 교서는 관직으로 관청의 책을 관리하는 자리다.

당시 설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절도사 위고가 그녀를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려했는데, 여자에게 일찍이 그런 예가 없다고 부하들이 극력 반대하여 포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그 뒤 기생을 교서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묘비명의 교서는 후세사람들이 임의로 추서(追敍)한 관직이다. 말하자면 명예 교서인 셈이다. 묘비명 좌우에는 ‘1994년 10월 설도연구회에서 세웠다’고 적혀있었다. 설도 사후 1100년도 훨씬 더 지나 세워진 묘비다. 묘비 뒤에는 생몰년을 당 덕종 건중2년, 당 문종 대화 6년 이라고 새겨놓았다. 서기(西紀)로 치면 781년에서 832년이다. 설도의 출생년도의 경우 대체로 당 대력3년(서기 768년)으로 알려져왔으므로 많은 차이가 있다.

아무튼 이처럼 망강루 공원에서 아름다운 시을 후세에 남긴 설도를 기리려는 중국인들의 많은 노력과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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