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축장에서 하루를 시작하게 된지 어느덧 1년이다. 동물을 좋아해 수의사가 된 나로서는 도축장에서 도살되는 동물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든 딜레마였다.

도축장으로 출근한 첫 날, 코를 자극하는 오랜 세월 진하게 베인 도축장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내 마음은 비장해졌다. 오늘부터 여기가 내가 일할 곳이고 나는 이곳 도축장의 도살되는 가축을 검사해서 최종 합격시키는 중대한 업무를 맡은 축산물 검사관이지 하는 생각과 함께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 도축장 업무가 이제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누군가 물어올 때면 수의사란 말 대신 검사관이란 말이 더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곤 한다.

‘국민 밥상’을 책임지는 검사관

깔끔하고 쾌적한 일반 사무실과 달리 도축장에서의 하루는 소, 돼지가 계류돼 있고 가축의 분변 및 피 냄새로 가득한 싸늘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비로소 시작된다. 도축장에서 가장 바쁜 시간은 작업을 개시하는 오전 7~9시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출근하자마자 커피 한잔 마실 시간도 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작업복으로 중무장을 한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방역복, 마스크, 일회용 모자를 쓰고선 하루 평균 7~8시간 동안을 꼬박 서서 넓은 도축장 이곳 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면 퇴근할 때쯤엔 방역복 안의 가운은 땀으로 범벅이 된다.

도축과정을 간단히 설명하면 검사관은 신청서 등 각종 서류를 확인하고 계류장을 둘러보면서 병든 가축이 있지는 않은지 가축의 자세, 거동, 영양상태, 호흡 등을 체크하며 건강이상여부를 확인한 후 이상이 없는 가축에 한해 도축을 허가한다. 도축된 가축은 내장, 지육 등 각 부위별로 검사를 받고 식용으로 공급 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폐기가 되고 안전한 축산물임이 증명된 식육에 한해 비로소 합격 검인이 표시된다.

하지만 이것으로 검사관 업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혹시나 식육에 동물약품이 잔류돼 있지는 않은지 검사하고 작업장의 도축과정이 청결하게 이뤄지는지 살펴보기 위해 미생물 검사 등을 추가적으로 한다. 이외에도 도축장의 위생관리기준 및 HACCP 이행여부를 상시 점검·감독하는 일까지 검사관의 업무로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또한, 도축신청에 필요한 서류나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무작정 소를 몰고 와 도축을 해줄 것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는 민원인부터, 해체검사를 통해 병변을 발견해 폐기처분이라도 하면 다짜고짜 심한 욕설을 퍼붓거나 거친 행동을 보이며 “네가 공무원이면 다냐? 수의사가 무슨 벼슬이냐?”하며 난동을 부리는 식육업자까지 많은 민원인들도 적지 않게 상대해야한다.

그러나 이젠 시간이 제법 흘러 아무리 민원인이 찾아와 횡포를 부려도 법적근거와 정당한 폐기사유 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여유를 갖게됐다.

도축검사를 의뢰한 민원인이야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고 나도 검사관으로서의 맡은 소임에 최선을 다하고자 공평하게 법을 적용하고자 하는 것뿐이니, 민원인도 나도 합리적인 조율이 필요하다.

도축장에서 일하다 보면 꼭 어렵고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축장 직원분들이나 민원인들이 수고가 많다며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자판기 커피 한잔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처음엔 거칠고 무서워 보이기만 했던 도축장 아저씨들도 알고 보면 정 많고 인간적인 분들이어서 아무리 나이 어린 여자 검사관이라 해도 친절하고 깍듯한 말투로 대해주신다. 이젠 그분들과도 정이 들어서 순환근무가 끝나고 다른 도축장으로 이동할 때가 되면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들곤 한다.

철저한 검열로 안전한 축산물 제공

몇 년 전만 해도 도축검사업무는 남자들만이 할 수 있는 거칠고 험한 일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엔 여성검사관들이 부쩍 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나와 같은 일을 하게 될 후배 여성 공무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도축검사는 여전히 수의사의 기피업무로 인식되고 있지만 내 가족을 포함한 온 국민들의 밥상에 오르는 축산식품의 안전을 책임지는 축산물검사관의 일은 매우 보람이 있고 자랑스러운 일로 수의사로서 꼭 한번쯤은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도 나는 도축장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내가 검사하고 합격시킨 안전한 축산물이 대형마트나 식당 등에 출고돼 많은 이들의 입맛을 즐겁게 해줄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최근 불법도축소 파문으로 축산물 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걱정이 커진 상황을 지켜보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열심히 도축검사에 임해 국민에게 보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검열을 통과한 안전하고 우수한 축산물을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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