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부 뼈저린 후회

여자가 갑자기 거들을 꺼내 입는다는 것은 무장을 하자는 것이다. 자신을 시장에 던져놓고는 장사꾼들의 공격에 대비하자는 것이다. 이 정도로 무장을 하면 어떤 공격을 당해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입술이 없는 치아처럼 여름옷은 속수무책이다. 그렇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다. 문은 닫되 걸어 잠그고 싶지는 않다. 눈치봐가며 요령껏 열고 들어오라는 뜻이다. 혜원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향수 한 방울을 뿌린다. 향긋한 냄새를 맡아보고는 이제 됐어 하는 표정으로 방문을 열고 나온다. 남편은 보이지 않는다. 남편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현관문을 탕 닫고 나가려고 벼르고 나왔는데….

“어디 갔지?”

입고 있던 옷을 소파에 벗어놓고 운동복 차림으로 나간 것으로 보아 멀리는 안 갔을 것이다. 동네 목욕탕 아니면 뒷산에 갔을 것이다. 긴장감이 확 풀리면서 남편이 무슨 증거를 갖고 있기에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지 궁금해진다. 여자 특유의 도심이 발동한다. 남편이 벗어놓은 옷을 뒤진다.

남편이 들고 나와 혜원을 윽박지르려고 하다가는 차마 입에 담기조차 싫다던 그 봉투가 나온다. 한국통신이라고 쓰여 있다. 집 전화로 시외전화나 휴대폰으로 통화한 내역을 기록한 자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완수 씨하고 통화한 일자와 통화시간 밑에는 빨간 색으로 밑줄이 그어져있다.

‘이 남자가 언제부터 눈칠 챘지?’

정신이 아찔해진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남편이 이 서류를 발급 받은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는 자료다. 언제부터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감시를 했고, 증거까지 치밀하게 모았지? 완수 씨에게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했는데도, 툭하면 집으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김 사장님 댁이죠?”

이렇게 능청을 떨며 전화를 걸면 그게 완수 씨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집에 안 계신데요.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전 세무서에 다니는 친구인데요. 혹시 사모 님 아니신가요?”

“완수 씨! 정말 자꾸 이럴 거예요?”

이때마다 혜원은 기분이 좋았다. 겉으론 앙탈을 부리는 척 했지만 그러는 게 싫지 않았다. 밤마다 은근히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수 씨의 전화는 낮에 문자로도 계속됐다.

“나 지금 밥 먹으로 가요. 차 마시러 커피숍에 왔어요. 조금 있다가 사무실로 갈 거예요.”

이런 전화는 밤에도 계속됐다.

“집에 혼자 있어요. 마누라가 애들 데리고 친정에 갔거든요. 내일이 장모님 생신이래요. 오늘은 혼자 외롭게 자야 돼요.”

그러면서 그의 숨결이 급해졌다.

“혜원 씨! 오늘 우리 같이 자요. 남편도 없는 빈방에서 혼자 잘 이유가 어디 있어요? 이리로 좀 더 가까이 오세요. 가슴이 원래 이렇게 작아요? 한 손에 다 들어오잖아요. 여기가 거기에요? 내건 너무 크죠? 한번 만져 볼래요? 엄청 나죠? 그 친구는 어때요? 목욕탕에 같이 갔을 때 보니까 덩치에 비해서 너무 작은 것 같더라구요.”

혜원은 고개를 흔든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다. 설마 통화내용까지 다 녹음해 놓진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쉽게 무너질 순 없다. 어떻게든 반격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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