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부 뼈저린 후회

그래서 알고도 모르는 척 무심하게 산다. 나이가 사십이 넘도록 결혼도 안하고, 서울로 청주로 따라다니는 그 여직원이 마누라이고 난 파출부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앉아있자니 마음이 허전했다.

“만약에 당신이 그 누구와 사랑에 빠지면….”

그녀의 허전한 가슴을 구성진 노래가 파고들었다. 가냘픈 여자악사가 부르는 노래 소리였다. 카바레를 그렇게 빠대고 다녔지만 여자 악사가 흔치 않았고,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여자 악사는 처음 보았다. 어쩌면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불러대는지 점점 노래에 빨려들고 있었다.

놀 생각은 아예 포기했다. 노래나 실컷 듣다가 나가자는 심정이었다. 그때 웬 남자가, 그것도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가 혜원이 옆에 앉는 게 아닌가. 일진이 나쁜 날이라고 생각하고 남자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남자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뺑이들이 으레 하는 것처럼 힐끔거리지도 않았고, 엉뚱한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출입구 쪽만 바라보는 것으로 봐서 약속한 여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혜원씨. 오래간만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듣고 혜원은 얼어붙고 말았다. 아는 사람을 피해 도망 온 이 낯선 청주에서 나를 보고 혜원씨라고 이름을 부를 사람은 없다.

혹시 내 옆에 혜원이라는 여자가 또 있나 하고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내 팔을 살며시 끼더니 풀로어로 나갔다. 난 도저히 저항할 힘이 없었다. 목소리도 익었고,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도 정겨웠다. 난 눈을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완수씨!”

혜원이가 그토록 가슴앓이를 하던 완수 씨였다. 화영이와 청주를 가면서도 혹시 하는 기대를 했고, 사람들 틈에서 끝없이 완수 씨를 찾고 있었다. 막상 완수 씨를 만나서 춤을 추면서도 여전히 얼어 붙어있었다. 완수 씨에게 좀 더 근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게 창피했다. 기왕이면 멋진 남자하고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랬다면 날 프로로 봤을 거다.’

난 프로가 아니다.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가끔씩 찾아오는 가정주부다. 내가 남편의 바람 끼 때문에 속을 썩이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남편친구들이 더 잘 안다. 완수 씨도 충분히 이해할 거다. 그렇더라도 나의 이미지에 어울리려면 얌전히 앉아있어야 했다.

혼자 앉아있으면 외로워 보이니까 화영이하고 나란히 앉아 춤 구경을 하며 재잴 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을 것이다.

주위에 남자들이 꼬여들어 경쟁적으로 나에게만 손을 내미는 바람에 아주 곤혹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혜원은 이런 공상을 하며 침대에 누워있다. 남편이 방문을 열어보고 나간다. 모처럼 집에 같이 있는 날, 거실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싶은데, 아침부터 부어있는 아내가 마땅치 않다는 표정이다. 혜원은 시계를 본다.

12시가 채 안되었다. 남편은 시간밥을 먹는다. 완수 씨하고 2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12시가 되기 무섭게 점심을 차려주고 나가자. 이때 거실에 있는 전화가 울린다.

“네,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혜원은 자신을 찾는 전화라고 직감하고 부스스 일어난다.

“여보! 전화 받아.”

수화기에서는 화영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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