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어린시절 끝없는 좌절감에 오기 발동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해외진출 성공

“지역주의 초월, 강한 경쟁력 키우자”

 

 

그는 1955년 충북 증평에서 부유한 종가집 장손으로 태어났다. 한때 드넓은 초원에서 소떼를 멋지게 몰고 다니는 목장주를 원했던 그는 그 꿈을 이루고 위해 청주농고에 진학했다.

“농고에서의 생활은 나의 기대와 너무나 달랐어요. 축산일도 아닌 농사일들을 실습명목으로 시키는 것을 보고 학교를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감이 밀려왔지요. 자연스레 공부는 멀어지고 싸움꾼으로 변해가자 어머니는 나와 학교에 반은 같이 다닐 정도로 선생님께 불려오는 횟수가 잦았어요.”

그는 고교시절에 이렇게 회상했다.

군 제대 후, 가세가 기운 가운데 어머니마저 암에 걸리자 병원비를 벌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던 그는 현지에서 적응이 될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당시 눈물이 앞을 가렸어요. 비행기 값이 없어서 국내에 돌아갈 형편도 못되고… 좌절감 한편으로 오기가 발동해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나름 고민도 했지만 현실은 막막하기만 했지요.”

귀국 후 작은 시계회사에 취직해 영업수완을 인정받던 그는 친척의 빚보증으로 인해 또 한 번의 시련을 맞이한다.

“자살을 할 생각으로 충북 보은에 있는 속리산호텔을 찾아가 방 하나 달라고 했더니 프런트 여직원이 직감을 했던지 혼잣말로 ‘누구 송장 치울 일 있나’라며 거절을 하더군요. 그래서 허름한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산으로 자살을 결행하러 가는데 어머니의 환영이 보였어요. ‘너 왜 이러고 있니?’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이러면 안 되지’하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다시 차리기로 결심했지요.”

서울로 돌아온 그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지인들의 도움으로 오뚝이처럼 일어나 1988년 로만손시계를 창업했다.

“1988년은 국내 시계업체들이 올림픽 특수를 타고 늘어난 내수시장에 모두 만족해하면서 안주하던 시기였지요. 하지만 난 좁은 내수시장을 감안해 신생업체인 로만손이 살 길은 해외시장밖에 없다고 판단해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와 두바이를 비롯한 동남아 지역을 찾아다니며 시계전시회가 열린다고 하면 무조건 달려가서 샘플을 전시하며 직접 세일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공항에서 밀수꾼으로 오인도 받았다.

하지만 이 덕분인지 로만손는 이제 세계 70여 개국에 연간 40여만 개의 시계를 자체 브랜드로 수출하고 있고 200여종의 신제품을 지구촌 곳곳에 쏟아냈다.

한편 세계시장에 뛰어들려면 ‘디자인’에 도전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독창적인 디자인 개발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 회장은 어느 날 문득 시계유리를 깎아서 보석 효과를 나게 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로만손만의 독특한 커팅글라스시계를 탄생시킨 배경이다.

커팅글라스는 보석의 이미지를 시계에 접목시켜 시계의 유리표면을 각이 지게 깎는 것인데 훗날 로만손의 자립기반의 토대가 마련된 것도 바로 이 기술 덕분이었다. 창업 2년 만에 이 커팅글라스 제품으로 유명브랜드가 된 로만손은 해외 바이어들간에 독점권을 두고서 과당경쟁까지 벌어졌다.

“전시장으로 안내한다고 하던 바이어들이 우리를 납치해 차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거에요. ‘백만달러를 선불로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길래 ‘수용 못하겠다’고 답하자 ‘그럼 이곳에서 장사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거에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한발 물러섰더니 그제야 집으로 데려가 중동사람들이 가장 귀한 손님이 왔을 때에 내놓는다는 양고기 요리로 융숭한 파티를 열어주데요.”
김 회장은 제조기술 못지않게 ‘디자인 제일주의’ 경영방침을 고수한다.

“난 후발주자인 로만손이 디자인이 뛰어나지 않으면 소비자들의 이목을 끌지 못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지금도 회사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도 디자인실입니다. 로만손의 모든 제품은 디자이너로부터 시작된다는 사명감을 디자이너에게 고취시키고자 디자인 개발에 모든 업무의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지요.”

세계적인 시계디자이너 울프강 존스(스위스)을 과감하게 회사에 채용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2000년도에 현대아산과 북한이 합의해 대규모 대산업단지가 된 개성공단 한 가운데 북한노동자 1천88명 정도가 일하고 있는 김기문 회장의 로만손 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전 개성공단이 중국과 비교했을 때 언어가 통하고 거리가 가깝고 무관세 지역이고 무엇보다 중국보다 인건비가 싸다는 장점 때문에 여러 가지 위험요소를 무릅쓰고 입주를 결정했어요.”

실제로 로만손이 입주한 이후 북한의 미사일 발사라든가 핵실험 등 여러 가지 일로 굉장한 혼란도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개성공단은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고위험, 고수익) 요인을 안고 들어갔는데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셈이 됐습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 회장은 또 이렇게 말했다.

“개성공단에 투자하는 것은 경제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제가 개성공단 투자를 결정한 이유는 남한에서는 시계 생산 인프라가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현재 인건비를 포함한 가격면에서 볼 때 우리는 중국을 따라잡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중국은 품질면에서도 빠르게 우리를 추격해오는 바람에 많은 국내의 시계공장이 중국과 동남아로 떠나고 있는 실정이지요. 이때 제가 주목한 곳이 개성공단이었어요. 불확실성도 있지만 그보다 많은 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경쟁력 있는 제품으로 세계시장을 지속적으로 공략하려면 우리 제품은 우리나라 안에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이 딱 맞아 떨어졌어요.”

사실 개성공단 입주는 가격 면에서 볼 때 인건비가 남한 공장의 2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중국의 동북 3성과 비슷하나 심천공단보다는 절반 정도 싸며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중국이나 동남아에 비해 납기일 면에서도 경쟁력이 매우 높다.

김 회장은 누가 봐도 진짜 충청도 사람이다. 인정이 넘쳐 보이면서 푸근한 느낌의 얼굴에 약간 어눌한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김 회장은 고향을 이렇게 얘기했다.

“고향하면 오솔길이 있고 시냇물이 흐르고 사람들의 정이 느껴지는 그런 곳이잖아요. 하지만 지난 추석에 성묘을 갔더니 새 도로가 뚫리는 바람에 고향의 따뜻한 느낌이 많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움도 있었어요. 구체적으로 우리 충청도 하면 시골이고 인구도 적고 도세도 약하고 낙후돼 있고…. 주로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강하지요. 또 충청도 사람들은 전라도나 경상도처럼 화끈하게 뭉치거나 밀어주고 당겨주는 끈끈한 맛이 없다고 얘기하는 재경출신 인사들도 종종 봤습니다. 하지만 전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세계 대통령이라 불리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충청도 출신이며 그런 분들이 고향 후배들을 많이 사랑하고 있고 이런 분들을 본받다 보면 비록 작은 도이기는 하지만 더 큰 일을 해내는 충청도 사람들이 더 많아 지리라 확신합니다.”

김 회장은 이어 “지금 우리가 글로벌을 추구하면서 세계화를 부르짖는 마당에 충청도가 어떻고 경상도와 전라도가 어떻고 하기보단 지역주의를 초월해서 보다 큰 마음을 가질 때 강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저 역시 도세가 약한 충청도에서 중소기업 중앙회장에 출마했지만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출마한 사람보다 더 많은 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됐습니다. 또 2년 연속 전국 JC중앙회장이 충북에서 나왔다는 것도 충청인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중소기업 중앙회장은 우리나라 300만 중소기업의 수장으로 그 임무와 책임이 매우 큰 자리이다.

지난 2007년 3월 김 회장은 “중앙회의 조직과 시스템을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기업형 조직으로 개편해 중소기업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대변하겠다”며 23대 중소기업 중앙회장직에 출마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다.

“중소기업 중앙회는 중소기업이 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단체입니다. ‘중소기업을 위해 어떤 서비스와 정책을 개발할 것인갗하고 존재의 이유가 있는 중앙회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변화를 시도하다 보니 회원사들이 많은 찬사와 응원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그러나 “사회에 항상 반대파가 있듯이 중앙회 내에서도 일을 추진하다가 잘못한 꼬투리라도 잡으면 딴죽을 거는 사례가 있지만 다행히 중앙회장직을 열심히 사심 없이 하다 보니 90%이상의 조합 이사장들이 지지의사를 밝힐 만큼 반대파들도 다 내편으로 돌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지금 중앙회 조직이 매우 생동감 있게 열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자평했다.

김기문 회장은 중소기업 중앙회장에 취임한 후, 더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침에 출근해서 로만손과 개성공단, 중소기업 중앙회 업무를 보며 저녁에는 비즈니스 손님을 밤늦게까지 만나다보니 눈코 뜰 새도 없이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고 한다.

‘왜 그렇게 남들보다 열심히 사는갗라는 질문에, 김 회장은 “그래도 중소기업 중앙회장을 하는 동안만큼은 우리나라 중소기업을 위해 봉사하면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이지요”라며 특유의 강하면서도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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