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원성에서 만나는 ‘강한 고구려’
국원성에서 만나는 ‘강한 고구려’
  • 이경호 기자
  • 승인 2007.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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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지역, 중원고구려비·장미산성 등 유적 산재
   
 
  ▲ 장미산성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고구려 역사는 기원전 37년부터 700여 년간 이어왔던 우리 민족의 최대 황금기였다.

그런 고구려가 중국 당국의 의도적이면서도 부당한 역사왜곡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들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고구려의 국원성이 자리 잡았던 충북 충주를 비롯한 중원지방에는 중원 고구려비를 비롯한 고구려의 살아있는 역사가 엄연히 존재한다.

특히 충주시와 정부는 국내 유일의 고구려비와 고구려 역사 유물·유적 등이 산재한 충주지역을 중심으로 고구려 역사를 재정립하고 만천하에 알리려는 노력을 펼치며 중국의 역사왜곡에 당당하게 맞서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충주와 고구려

고구려는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과시했던 나라로 중국의 수·당과 맞서 한반도를 지켜온 나라였으며 만주와 연해주지역까지 지배한 당당한 제국이었다. 역사적 인물인 광개토호태왕과 을지문덕, 연개소문이 자랑스런 용맹을 떨쳤던 강한 고구려가 내륙의 중심에 위치한 충주와는 어떤 관계였을까.

정칟문화·경제·교통의 요지에 있는 충주는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관련해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 기능을 훌륭히 수행했던 지역이며 충주의 고구려식 이름인 국원성이라는 명칭과 중원고구려비의 존재 등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사실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지역이 고구려의 중심무대였기 때문에 국내에서 고구려의 유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중원의 땅 충주에선 쉽게 고구려의 흔적을 찾을 수 있고 또 고구려가 부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 일대는 2천여 년 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경지로 삼국의 세력이 충돌했던 곳으로 삼국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이곳을 차지하는 과정에 많은 유물·유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의 혼과 맥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은 중원고구려비(국보 205호)와 장미산성, 봉황리 마애불상군 등 세 곳이다. 고구려 역사기행의 시작으로 중원고구려비 앞에 서면 고구려는 우리들 가슴 속에서 되살아난다. 특히 중원고구려비는 중국 땅에서 천년 넘는 세월을 버티고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겹쳐지면서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충주의 고구려 편입 시기

남한강 상류의 중심문화권이었던 충주는 당초 백제의 영역이었다. 가금면의 장미산성에서 새발자국무늬 토기가 출토됐고 금릉동에서 백제시대의 무덤이 대량 발굴되는 등 충주가 백제의 영향아래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면 충주가 고구려와 접촉한 시기는 언제인가.

충주가 고구려사에 편제되는 계기는 광개토태왕릉비문으로 영락 6년(396) 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는 고구려 광개토왕이 수군작전을 통해 백제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58성과 700개 촌을 점령했다는 전승기 사이다. 백제왕은 광개토왕에게 노객(奴客)의 맹세를 하고 남녀생구(男女生口) 1천명과 세포(細布) 1천필, 그리고 왕제와 대신 10명을 볼모로 바쳤다.

이때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노획한 58성의 소재지는 영락 6년에 단행된 광개토왕 친정의 성격 내지는 고구려 정복의 방향을 암시해 준다. 58성 가운데 영락원년에서 5년에 걸친 대백제전의 전과는 27성이었고 그 소재지는 대략 예성강에서 임진강선으로 비정된다.

나머지 31성의 점령과정은 백제 아신왕을 기습 공격해 항복을 받아내고 그 결과로 받아낸 성으로 추정되고 그 지역은 인천의 미추성과 같은 경기만 일부 지역도 포함됐지만 대부분 남한강 상류지역으로 예측할 수 있다. 충주도 응당 이에 포함돼 고구려의 세력권내에 속하게 됐던 것으로 예상된다. 즉 충주가 고구려와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은 적어도 396년경부터의 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의 국도 국원성의 의미

고구려가 충주지역 이름을 국원성이라 부여한 시기는 396년에서부터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는 427년 사이의 시기인데 이는 국내성에 도읍하고 있을 때 백제를 통제하기 위해 평양성을 별도(別都)로 이용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서울의 북부지역인 북한산성을 장악하고 남평양성이라는 별도를 설치한 것과 같은 성격으로 파악된다.

즉 충주에 국원성을 별도로 설치한 것은 고구려가 남한강으로 진출하고 400년 신라의 구원을 명분삼아 5만의 고구려 보병이 출병한 이후 남한강 상류지역을 교두보로 소백산맥 이남의 신라경영을 전담할 별도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증거는 역시 중원고구려비이다. 5세기중반 께에는 적어도 소백산맥 안에 구축된 고구려 세력권은 점점 약해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서 장수왕은 신라 지역에 확보된 거점을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아직까지는 비교적 느슨하다고 판단된 나제동맹을 해체시켜 백제를 견제·고립시키고자 했다.

고구려는 이탈해 나가는 신라를 자국 영향권에 다시금 포괄하기 위한 목적으로 형제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전관계로의 복귀를 호소했다. 그러한 차원에서 장수왕은 신라왕과의 회동을 시도했다. 비석은 이 같은 선상에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고구려가 충주를 지배한 것은 영락 6년(396)때부터 신라의 진흥왕이 이 지역을 차지한 6세기중반 까지의 약 150년간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유적

중원 고구려비는 국보 205호로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에 있다. 석비의 형태는 석주형으로서 자연석의 형태를 이용해 각 자면을 다듬고 비문을 새겼는데 비두부터 광개토대왕비와 흡사하게 두툼하고 무게가 있어 보이며 글체는 고졸한 예서풍이다. 비문은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이 정확한 판독 가능한 상태이나 석비서두의 ‘고려대왕’이란 명문의 고려는 고구려를 가리킨다.

장미산성은 가금면 장천리에 있는 사적 400호다. 이 성은 둘레가 2천940여m로 처음에는 백제가 성을 쌓아서인지 백제대의 유물이 많이 발견됐다. 돌로 쌓아올린 포곡식의 성으로 인근의 중원고구려비와 관련해 고구려 세력이 충주지역을 차지했을 때 다시 쌓여져 삼국시대의 역사변천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보물 1401호로 가금면 봉황리 내동(안골마을) 햇골산 기슭에서 약 30m되는 중턱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동쪽을 향해 위치하고 있다.

암벽의 높이 1.7m, 너비 약 5m의 넓은 바위에 일렬로 8구의 불, 보살상이 양각돼 있는데 1.4m 높이의 반가사유상을 중심하여 보살 5구가 조각돼 있으며 별도로 여래좌상과 측면으로 공양을 하고 있는 보살상이 조각돼 있다. 삼국시대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여기에서 한강이 바라보이는 거리도 그리 멀지 않다.

단양 온달산성은 사적 264호로 지난 1979년 지정됐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의 사위 온달이 신라군의 침입 때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전설이 있는 옛 석성(石城)이다. 성의 둘레 683m, 동쪽 높이 6m, 남북쪽의 높이 7∼8m, 서쪽의 높이 10m, 성의 두께 3∼4m. 영춘을 돌아 흐르는 남한강 남안의 산에 길이 70cm, 너비 40cm, 두께 5cm 크기의 얄팍한 돌로 축성한 성으로 약 100m 정도가 붕괴된 것 외에는 대체로 현존한다.

아차산성은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 일대에 걸쳐있는 아차산에 남아있는 고구려 보루 흔적을 갖고 있으며 80여 개 보루 가운데 30여 개가 비교적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대치하던 시절 군사 유적인 보루에는 여러 개의 토기와 항아리가 발견됐으며 특히 온돌 시설이 있어 우리 문화의 원형으로 고구려 문화를 보여준다.

▶충주에서 다시 태어난 고구려 역사

현 분단 상황에서 고구려 얼을 살릴 수 있는 사업은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여건을 갖춘 지역은 남한의 충주지역이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충주지역에서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 문화 복원문제 등에 대한 대처는 미흡하다 못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에 대해 길경택 충주시 학예연구사는 “시가 중원고구려비 주변을 정비하자는 계획을 입안, 매년 충주문화원에서 고구려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세계무술축제를 개최하며 고구려의 기상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부족하다”며 “이에 대한 접근은 지방자치단체만의 노력이 아닌 국가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남한 내에 있는 모든 고구려 관련 자료를 한 자리에 모아 보여주고 알리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하며 그 방법은 국립고구려박물관 건립이 필수”라며 “그 위치는 고구려 남방정책의 최고 거점이었던 충주가 최적지이며 부족한 유물을 확보하고 각종 자료를 착실히 발굴해 정리한다면 충주에서 고구려 역사가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충주시는 이와 관련 2008년까지 사업비 78억원을 투입해 중원 고구려비가 있는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주변 3만3천㎡(9천980평)에 고구려역사전시관 건립 등 정비사업을 추진한다. 시는 중원고구려비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문화재 보존관리와 주변 일대를 역사관광 답사지로 개발하는 것은 물론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는 등 충주지역을 국내 고구려 역사의 중심으로 가꿔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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