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

필자는 효자가 아니다. 초3 때 친모와 생이별하고, 중1 때부터 계모와 함께 살다 보니 엄마에 대한 애틋함이 없다. 농사일밖에 모르는 아버지는 답답하고 싫었다. 지속되는 가정불화가 엄마를 지키지 못한 것이 아버지 탓으로 여겨져 미울 때도 많았다.

청년 시절과 결혼 초, 집안 어른들의 ‘효도해라’라는 말씀에는 짜증이 났다. ‘효도하고 싶어도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걸 어떡하라고!’ 속으로 반항했다.

그렇다고 불효의 마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효를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컸다. 머리로는 효도해야지 했다가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괴리감에 괴로웠고, 스스로 자책했다.

그러나 많은 자책에도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필자의 마음과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 아내는 먼저 시댁에 연락하고, 혼자서도 찾아가고, 집안 행사에 앞장서면서 남편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고 있다.

지난주, 부부학교 후속 모임이 있었다. 코로나19로 한참을 만나지 못했던 5개 가정이 밤이 깊은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그중 한 아내(A)는 부모에 대해 필자와 반대였는데도 많이 힘들어 했다. A는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오빠를 대신해 애쓰며 살아왔다. 지적받고 혼나는 오빠가 한심해 보였고, 그래서 ‘나는 올바르게 살아야지’ 하는 자기 신념이 생겼다. 많은 부분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성격이 되었다. 자녀들이 커가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큰 딸과 부딪히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고, 본인도 자녀도 행복하지 않았다. 더구나 몇 년 전에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마음의 힘듦은 더 커졌다.

엄마가 쓰러지기 전에 한동안 전조증상이 있었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며 자책했다. 병원에도 모시고 갔지만, 더 큰 병원 더 좋은 병원으로 모시지 못해 증세가 악화된 것 같다고 자책했다. 마치 죄를 지은 것 같은 죄책감도 느꼈고, 그 스트레스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면서도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또 자책했다. 어린 시절의 얽매임이 반복되고 있다.

유교적 전통 사상의 관점에서 필자와 A는 양 끝단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죄책감에서 오는 고통은 비슷하다. 필자와 A의 중간쯤 어디에, 불효도 아니고 너무 지나친 얽매임도 아닌 절충지대가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 양 끝단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자책감이나 죄책감은 사실, ‘나는 나쁜 사람, 비난받는 사람(불효자)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아야지’라는 자기 신념이 강할 때 더 크게 작용한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A의 엄마는 식당 일을 좀 무리한 탓에 피곤한 것뿐이었다. 의사도 아닌 딸이 어찌 뇌경색을 진단할 수 있겠는가? 모셔간 병원의 치료 결과를 어찌 예측할 수 있겠는가? 효자여야만 하는, 부모를 실망시키지 말아야 하는 어린 시절의 반복이었다.

성경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아담의 뼈로 여자를 만든 것에 대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떠난다는 것은 불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고, 독립적인 가정을 이루며 잘 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부모에게서 떠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녀도 떠나보내지 못해서 힘들어 한다. 이제라도 한국의 가정들은 건강하게 떠나고, 건강하게 떠나보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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