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미술학교 졸업 후 제작 활동·후배 양성 활발
제자 구본웅·윤효중 등 조선미전 출품해 입선
근대적 자각으로 훗날 걸작 ‘소년’ 탄생되기도

청주시립미술관이 진행한 특별전 ‘김복진과 한국 근현대 조각’ 전시.
청주시립미술관이 진행한 특별전 ‘김복진과 한국 근현대 조각’ 전시.

 

[충청매일 김정애 기자] 식민지 조선에는 미술학교가 개설되지 않았으므로 초기의 조각가들은 일본으로 유학해 조각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회화에 비해 근대조각의 형성이 더딘 이유이기도 했다.

청주시립미술관(관장 이상봉)이 진행한 특별전 ‘김복진과 한국 근현대 조각’ 개최 기념 학술 세미나 ‘김복진 이후 한국 조각의 전개와 전망’에서 최태만 국민대 예술대 미술학부 교수는 “조선미전은 1932년 제11회전에 조각부를 공예부와 통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1934년까지 조각부를 폐지했다고 할 수 있다. 김복진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한 이듬해인 1935년 제14회부터 조각부를 부활해 독립된 부문으로 공모를 진행했다”며 “조선미전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적극적인 홍보와 신문 매체의 열렬한 호응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언론을 통한 미술여론의 확산은 미술비평의 활성화를 자극해 근대 미술비평의 전개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1940년 『조광(朝光)』에 김복진이 쓴 고백적 회고기에 의하면 그가 일본에서 조각을 배우고 돌아오기 이전에 김진석(金鎭奭)이 조선에 조각을 수입하기로 했으나 연구 도중에 요절하고, 김복진 보다 삼 년 정도 늦게 일본으로 갔던 진남포의 곽윤모(郭胤模) 역시 일찍 병사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최 교수는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돌아와 조각 제작 활동을 전개한 작가는 김복진이므로 그를 최초의 근대조각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복진을 가르친 아사쿠라 후미오는 그에 대해 “어학도 일어, 영어, 불어를 유창하게 하는 데다가 성격도 온화한 전도유망한 청년”이라고 평가했다.

조각과의 실기교육은 주로 로댕의 조각을 모범으로 삼아 이루어졌다.

최 교수는 “로댕의 조각이 김복진에게 미친 영향은 그가 로댕의 ‘이브’를 참고해 제작하고 제전에 출품해 입선한 ‘여인입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며 “애초에 문명비평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김복진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조각가로 활동하는 한편 문예운동가, 사회운동가, 미술교육자, 미술평론가로도 활동했다. 재학 중이던 1923년 여름방학 동안 귀국한 그는 서울의 YMCA 정측강습원에 미술연구소를 개설해 후진을 양성했다”고 전했다.

졸업 후에는 모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경성여자상업학교, 고학당(苦學堂) 등에서 후배 조각가를 양성하는 한편 정측강습원 미술연구소를 복원해 미술강좌를 개설했다. 이 미술연구소 출신으로 장기남(張奇男), 양희문(梁熙文), 구본웅(具本雄) 등을 들 수 있다.

출옥 이후 1935년 4월 서울 사직공원 부근에 미술연구소를 개설해 작업에 매진하는 한편 제자도 함께 양성했다. 김복진에게 조소를 배운 제자로 이국전(李國銓, 1915~ ), 장익달(張翼達), 이성화(李聖華), 홍순경(洪淳慶), 안영숙(安榮淑), 한재홍(韓在弘), 현호철(玄鎬喆) 등을 비롯해 일본인 사나카 미츠모리(佐仲三森) 등이 있다.

김복진의 제자 중에는 어려운 환경에서 고학하는 학생도 많았는데 그를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하면 서슴없이 주머니를 털어 돕거나 병을 앓는 제자에게는 자신이 아는 의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배재고보에서 김복진에게 배운 윤효중은 김복진의 ‘수제자’임을 자임했으며, 이성(李成, 1915~1982)은 1935년부터 2년간 조소 수업을 받고 제국미술학교로 유학해 졸업하였으며, 이국전은 니혼대학 예술과에 유학했고, 박승구는 도쿄미술학교로 진학했다.

최 교수는 “박승구를 제외하면 이들은 대부분 조선미전에 조각을 출품해 입선했으므로 근대조각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서 김복진이 했던 역할이 컸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복진 조각 재현 프로젝트로 제작된 김복진의 ‘소년’ 2022, 석고, 120×36×33cm.(제작 이병호, 장준호).
김복진 조각 재현 프로젝트로 제작된 김복진의 ‘소년’ 2022, 석고, 120×36×33cm.(제작 이병호, 장준호).

 

1922년 상품진열관에서 열린 제1회 조선미전으로부터 김복진이 최초로 출품한 1925년 이전까지 3회에 걸쳐 조소부문에 출품한 작가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1925년의 제4회에 김복진과 전봉래(田鳳來)가 출품한 이래 안규응(安奎應), 양희문, 장기남, 구본웅, 홍성덕(洪性德) 등이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김복진에게 조소를 배웠다는 점에서 근대조각에서 김복진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최 교수는 “김복진의 ‘백화(百花)’(1938년)는 일본에 의해 주조된 조선 향토색의 허구를 전복시킬 수 있는 작품이란 관점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허하백과 김복진 사이에서 중매를 섰던 박화성이 1932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장편소설을 인생극장 창단 기념으로 무대에 올렸는데 이때 주연을 맡았던 배우가 한은진이었으며, 김복진은 이 여배우를 모델로 ‘백화’를 제작했다. 한복을 입고 족두리를 쓴 여인이 두 손을 다소곳이 잡고 서있는 형상을 묘사한 ‘백화’는 소조 외에도 목조로도 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 교수는 “조선미전에 수록된 도판이 비로소 조각이라기보다 소조란 느낌을 강하게 드러내므로 목조로도 제작했을 가능성은 있다. 왜냐하면 김복진이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교수 중 한 사람이 다카무라였기 때문이다. 김복진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다데하다 역시 대부분 소조작업을 남겼으나 사실주의 기법에 충실한 조각가였음을 고려해볼 때, ‘백화’는 김복진의 무르익은 재능이 완숙에 이름에 따라 스승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복진은 수감생활 동안 쉬지 않고 목각을 제작함으로써 나무의 성질을 체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김복진이 조선미전과 함께 1938년의 신문전(新文展)에도 ‘백화’를 출품했다는 사실을 주목해볼 때 소조와 함께 목조로 제작했을 개연성이 높다.

최 교수는 “‘백화’에서 제기할 수 있는 다른 문제가 전통의 계승이란 문제다. 사실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전통의 계승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편적이고 속화된 판단에 불과하다. 김복진은 일본인들이 칭찬하거나 강조한 조선 향토색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만큼 전통 연구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이런 점이 그의 ‘백화’를 토속적인 풍속, 겉모습을 단순하게 재현, 묘사한 다른 작품들과 구별하는 척도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며 김복진의 제자 박승구의 이야기를 전했다.

박승구는 “선생은 조선 고전에 대하여서도 관심이 깊으시며 이를 계승함에 있어서 적극적이었으며 자기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기회만 있으면 여러 친구 제자들과 함께 친히 고찰(古刹)을 찾아서 그 건축물과 조각의 역사적 유래와 구조 및 그 조형성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었는바 그 설명에서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영위에 대하여 칭송하고 경탄하였다. 고전적인 조선 불상에 대하여서도 그 당시 인민들의 고귀한 품격과 수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한 수법과 품격은 선생의 작품에도 잘 반영되어 있는바 작품 ‘백화’의 목각상은 등신대의 대작으로서...”라고 회고한 바 있다.

‘백화’는 한은진을 모델로 제작한 것이나 그 형태와 내면의 세계는 불상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김복진은 ‘민족형식’의 창조적 계승을 자신의 과제로 삼아 이의 성취를 위해 꾸준하게 노력했음을 그가 발표한 1935년 조선미전 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특유의 정취는 하루 이틀에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며 손쉽게 모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조선의 환경에 그대로 물 젖고 그 속에서 생장하지 않고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출품한 것 중에 과연 조선의 일면을 표현한 것이 있는가. 공예품 중에서는 나는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섭섭히 안다. 조선이라는 개념에 붙잡히어 여기에 맞추어 보려고 고분벽화의 일부를 전재하기도 하고 고기물(古器物)의 형태를 붙잡아 보아도 이미 이곳에는 조선과 작별한 형태만 남는 것이다.”

 -김복진 글 ‘1935년 조선미전 평’-

1925년(제4회) 조선미전에서 그가 국내에서 최초로 발표했던 ‘나체습작’에 대한 자기비평에서도 그는 수작은 아니지만 향토성이란 것을 무리하게 짜내려다 거듭 실패했다고 반성하고 있다. 이는 조선적 형식의 창조적 계승이란 과제가 그의 평생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최 교수는 “그에게 있어서 ‘향토성’이란 과거의 복제나 재현이 아니라 그것에 바탕을 둔 근대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음을 그의 조각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에게 불상과 같은 고전은 이념적 뿌리이자 목표였으며 단순히 그것의 전승을 기도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에 새로운 생명성을 부여하는 조각적 방법을 찾아가는데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고 말했다.

김복진 공주 신원사 소림원 석고미륵여래입상, 1935년, 석고에 도금, 공주시 신원사 소림원 소장, 등록문화재 제620호.
김복진 공주 신원사 소림원 석고미륵여래입상, 1935년, 석고에 도금, 공주시 신원사 소림원 소장, 등록문화재 제620호.

 

최 교수는 김복진이 이런 근대적 자각이 있었으므로 훗날 ‘소년’과 같은 걸작을 제작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백화’의 단아하고 우아한 자태는 바로 불상으로부터 비롯된 형태이며, 한복 입은 여성의 형태의 단순 재현을 넘어서는 민족형식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던 노력의 결단을 보여준다. 이것을 ‘백화’와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전후해 나타난 무수한 이국취향적, 향토적 작품과 구별 짓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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