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기원전 325년 전국시대, 중원에 자리한 조(趙)나라는 나라가 쇠약해지자 외세의 침입이 빈번했다.

동쪽으로는 연나라와 제나라가 쳐들어왔고, 서쪽으로는 진(秦)나라가 쳐들어왔고, 남쪽으로는 초나라와 월나라가 자주 쳐들어 왔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조나라 제6대 임금인 무령왕(武靈王)이 즉위하였다.

주변 여러 나라가 군주를 왕(王)이라 칭하였다. 하지만 조나라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무령왕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왕이라니, 실속도 없는 그런 헛된 이름이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고는 자신은 여전히 군주(君主)라고 칭하였다. 이는 형식을 거부하고 실질을 숭상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 무렵 무령왕은 조나라의 복장에 대해 아주 불만이 많았다.

소매가 넓고 길어 생활에 아주 불편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선대부터 이어져 온 습관이라 하여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군대의 복장은 더욱 기가 찼다. 옷 입기도 불편하고 전쟁을 하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합리하고 비실용적이었다.

무령왕은 이런 복장의 폐단을 고치지 않고서는 외세를 물리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마침 서북쪽 유목민들은 옷차림이 간편하고 편리하여 행동이 자유로웠다. 그들은 그런 복장으로 말타기를 하고 활쏘기를 하니 신속하고 빨랐다. 무령왕은 유목민의 복장인 호복(胡服)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에 신하 누완(樓緩)을 불러 말했다.

“내가 군대에 호복을 도입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오랜 전통을 위배하는 것이지만 의복 하나를 바꾸어 빠르고 신속한 군대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대의 의견은 어떠한가?”

이에 신하 누완이 대답했다.

“군주께서 호복을 채용하기로 하셨으니 더는 신하들의 논의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큰일은 여러 사람에게 뜻을 묻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군주께서는 결정만 하시고 일은 신하들에게 맡겨주십시오.”

하지만 신하들은 조나라의 것은 선진적이라 여기고 유목민족은 오랑캐라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뿌리 깊은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무령왕의 호복 도입은 철저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무령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기존의 의복을 벗고 호복을 입었다. 그리고 반대 세력의 주동자인 공자 성(成)을 설득시켜 다음 날 호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하도록 했다.

이어 무령왕이 백성들에게 공표하여 호복 채용을 명하였다. 호복이 보급되자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조나라 군대였다. 특히 기병은 복장이 간편하여 군대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후로 조나라 군대가 출정하자 싸울 때마다 이겼다. 조나라의 명성이 알려지자 감히 쳐들어오는 나라가 없었다. 복장을 바꾼 작은 일이 쇠약해진 조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든 것이다.

실질주의(實質主義)란 형식과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내용과 실질을 중히 여기는 사상을 말한다. 새해의 소망이 부자가 되는 것이라면 아끼고 절약하며 살아야 한다. 부자처럼 먹고살아서 부자가 됐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aio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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