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덕초등학교 교감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컴퓨터 자판 중 가장 대중적인 형태는 쿼티(QWERTY)로 자판 왼쪽 위의 영문자 배열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19세기에 수동 타자기를 고안하던 시절, 타이핑이 빨라 종이를 때리는 키펀치가 엉키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였는데, 이 속도를 늦추기 위해 의도적인 자판 배열을 설계한 것이 쿼티 자판의 시작이다. 시절이 흘러 이제는 수동 타자기를 쓰는 경우가 없고 따라서 키펀치의 충돌도 사라지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어렵게 쿼티 자판을 익히고 그때의 방식으로 자판을 누르고 있다.

이렇게 어떤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더라도 그 길을 벗어나기 힘들고, 또 노력을 들여 벗어나려 하지 않는 현상을 경로의존성이라고 한다. 어떤 물체가 자신의 운동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 법칙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학습에서도 경로의존성은 나타난다. 처음 습득한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오개념이 생겨나고 한 번 생겨난 오개념은 잘 바뀌지 않고 생존전략으로 강화되기까지 한다.

나와 읽기 공부를 하는 1학년 지훈이. 지훈이와 읽기 공부를 하며 겪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수정해서 다시 배우는 일이었다.

지훈이와 소리 다루기를 할 때의 상황이다.

“‘곰’ 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찾아보자. 그오음.”

“기역이요.”

“다시 들어 봐. 그오음”

“미음이요.”

나와 공부를 시작하기 전 지훈이는 낱말카드로 글자를 익히고, 글자 이름을 외우고, 반절표로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를 연습했다. ‘곰’ 소리를 듣고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찾기보다 ‘곰’ 글자가 어떻게 조합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았다.

지훈이와 나는 소리를 다루고 있었지만 머리 속으로 떠올리는 장면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글자가 소리로 이루어진 것을 알려주기 위해 소리 다루는 힘을 길러주려 했지만 지훈이는 소리보다 글자의 형태와 이름을 먼저 익히고 공부했기에 소리를 다루는 과정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리를 들으면서도 글자의 형태를 떠올렸을 테고 그 결과 ‘곰’ 소리를 들으며 ‘그오음’이 아닌 글자의 이름 ‘기역’, ‘미음’을 말하게 된 것이다.

이제 지훈이는 소리를 잘 다룰 수 있다. ‘산’에서 ‘스아은’ 3개 소리를 찾아내고, 각각의 소리와 연결되는 글자를 찾아낼 수 있다. ‘공’을 쓰기 위해 ‘그오응’ 소리를 내고 3개의 자음자와 모음자를 조합시켜 글자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훈이가 글자보다 소리를 먼저 배우기 시작했다면, 아니 오히려 글자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오개념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더 일찍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그래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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