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헌 미술가

 

동안거에 접어들어 작업하기 좋은 때지만 뜻대로 되지가 않는다. 마음이 심란한 탓이다.

멀쩡하게 길을 걷던 사람이 느닷없이 158명씩이나 한 자리에서 압사당하는 일을 보게 될 줄이야. 그렇게 참사를 당한 사람들의 영정이나 위패가 사라진 분향소 하며 사망자의 명단공개를 두고도 개인정보보호니 2차가해니 하는 말들로 본말이 전도되는 사이 유족의 슬픔은 이리 찢기고 저리 차이는 모양새다. ‘특별수사본부’는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구조 활동을 벌인 119소방서장에게 현장지휘가 미진했다는 이유로 법률적 책임을 물어 입건하였다. 늘 하던 대로 경광등과 호루라기를 소지한 경찰기동대만 미리 배치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두고 사후조치에서 참사의 원인을 찾는 듯 보이는 태도나 인식이 의아하기만 하다. 과연 복무규정에 따른 위반사항이 적시된다는 이유로 혼란의 한 복판에 있던 경찰관이나 소방관에게 법률적 책임을 지운다고 해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억울함이 다독여질 수 있을까.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이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국가가 보호해줄 것으로 믿을 거라고 판단한 것일까.

부모는 자식이 어떻게 왜 죽었는지를 납득할 때 비로소 자식의 죽음을 인정하고 결별을 받아들이게 된다. 상갓집에서 문상을 할 때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묻고 답하는 걸로 위로와 애도를 대신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이태원에서의 참사를 애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렇게 많은 인파가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밝히고 사과하는 것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참사 초기 ‘이태원 사고 사망자’라는 표현에서 이미 죽음의 원인이 우발적 재난사고인 것처럼 특정함으로써 유가족의 분노를 자극하였다. 단지 일반적으로 쓰이는 행정용어이기에 적법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라는 해명이다. 슬픔을 위로하는 방식조차 규범적 사고에 의존한 셈이다.

법은 하등한 질서다.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선제적 기능 보다는 억제를 통한 순응을 유도할 뿐이다. 인간본성의 탐구와 해석에 기초한 자발적 참여가 아닌 질서유지에 초점을 둔 까닭이다. 법률적 책임과 보상만으로 억울한 죽음의 분노를 가라앉힐 피해자는 아무도 없다. 법대로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법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착각이다. 히틀러가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도, 6백만 유대인을 학살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 현행 법률에 근거하여 벌인 일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탈할 수 있었던 것은 불평등한 조약에 따른 법령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일본의 부당함에 항거한 안중근 의사를 처벌한 것도 일본의 형사법에 의해서다. 안중근 의사가 스스로 민간재판을 거부하고 군사재판을 요구한 건 법률에 의한 해석이 대의와 명분을 훼손시킬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법은 질서를 수호할 뿐 정의를 대신하진 못한다.

사정이 이럴진대 객관성 하나를 이유로 법 만능주의에 짓눌려버린 인간의 지성이 한 없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에 명시됐다고 하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그 말을 과연 믿어도 되는 것일까. 마음이 심란한 진짜 이유는 어쩐지 법(法)은 물(水)이 흘러가는(去) 이치가 아니라 법기술자의 재능에 이끌려 흘러가는 것만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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