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국정조사권을 두고 여야가 합의하자 국민들은 이제 국회가 제 밥그릇 역할을 하나 기대했다. 그러나 여야의 입장차로 당초 법정 시한(2일)과 정기국회 회기(9일)를 넘기며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2014년 ‘국회선진화법’ 시행 후 정기국회 내 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기에 지난 11일 민주당에서 단독으로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발의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여야의 대치는 극대극이다.

이에 김진표 국회의장이 ‘15일 본회의서 내년도 예산안과 세법 개정안 처리’ 방침을 밝히면서 ‘그때까지 여-야 합의가 안 되면 정부 원안, 또는 다른 수정안을 갖고 표결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야당인 민주당이 국민의힘과 합의가 되지 않으면, 예산안과 세법 개정안에 대한 민주당판 수정안인 이른바 ‘감액 예산안’과 ‘서민 감세안’을 통과시키겠다며 다수당의 힘 논리로 나가는 모양새다.

여야의 강대강 대치가 풀릴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예산안처리를 정쟁의 볼모로 잡는 모습만 더욱 노골화 되고 있다. 경제 위기라 민생 안정이 시급한데 예산안 늑장처리라는 고질적인 병폐가 되풀이되는 것 같아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야당을 설득할 생각을 하지 않고,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단독으로 예산안을 처리하겠다’고 으름장만 놓고 있다. 어찌보면 여당이 야당 같고, 야당이 여당 같은 이상한 풍경이다.

자칫하면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단독으로 예산안을 강행 처리할 모양새다.

따질 것도 없이 여야 모두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헌법은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인 12월 2일까지 국회가 이듬해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헌법마저 무시한 국회의 역할에 국민들은 한숨만 지을 뿐이다.

특히 최대 쟁점으로 부상한 민주당의 행안부장관 탄핵소추안을 놓고 여 야의 이방이 분명히 갈려 있어 더욱 그랬다. 만약 거대 야당이 압도적 과반으로 처리한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수용치 않으면 그만이고 이럴 경우 예산안 합의는 더욱 물 건너 갈 공산이 크다.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예산안이 정치공방의 희생양이 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민주당은 이달 초만 해도 639조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에서 ‘7조7천억원을 줄여야 한다’고 했고, 정부는 ‘3조원 정도를 줄일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2조원을 줄인 수정안을 ‘국민 감세안’이라고 부르며 단독으로 통과시키겠다고 한다.

정부가 줄이겠다는 3조원과 민주당이 줄이겠다는 2조원에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예산안에 대한 여야 간 이견은 늘 있었다. 그래도 조금씩 절충하며 합의 처리했던 게 그동안의 전통이었다. 지금 여야의 행태는 일부러 전통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인상마저 풍긴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말로만 민생·서민을 외치지 말고 국회의 의무인 내년 예산안부터 합의 처리하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심각한 경제위기가 온 다는 전망이 많다. 국민들의 삶이 더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이를 볼 때 어떠한 경우에도 민생보다 정쟁이 우선시돼서는 안 된다. 여러 정치 쟁점이 엉켜 있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예산안 처리가 우선이다.

경제·민생 최우선 관점에서 합의안을 도출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년도 일을 하기 위한 예산안부터 처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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