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디제라티 연구소장

한 나라의 운영을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직무할 관리들이 당연히 필요하다. 따라서 고대국가에서 인재선발은 공개경쟁 과거시험과 더불어 효행이나 학식이 높은 이들을 추천받아 관리에 임용하였다. 관리에게는 초임이나 승진시 임명장이 수여되는데 왕이 내리는 교지(敎旨)는 특권을 누리는 효과를 가진다. 그래서 예로부터 족보와 함께 특히 왕이 내린 임명장은 가보(家寶)로 소중하게 자손만대로 전해졌다.

필자가 지난해 청주시 내덕동 신일동(77)씨로부터 고려시대 왕지(王旨)에 대한 해석을 부탁받았는데, 그간 조선시대 교지를 비롯한 고문서 번역 자문을 한 바 있어 흔쾌히 수락하였다. 고려 왕지는 조선의 고신(告身)이나 교지, 대한제국시대의 칙명(勅命)과 같은 왕이 4품 이상의 관리에게 내리는 오늘날 사무관 이상 국가직 공무원 임명장에 해당된다.

이 왕지(이하 申祐 王旨로 칭함)는 고려 후기 경상도 의성 출신 무신인 아주신씨(鵝州申氏) 신우(申祐)가 받은 임명장이다, 지정(至正) 4년인 충혜왕 5년(1344) 4월 29일에 전투부대신호위(神虎衛) 보승(保勝) 정4품 섭호군(攝護軍)에 임명한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 군 계급으로 추측하자면 대략 군사 5천명(고려 정종 때 2軍 6衛의 기준)으로 구성된 대령에서 준장에 해당되는 연대장이나 여단장급이라 하겠다.

이 신우 왕지는 그 연대가 오래된 희소 사료이다. 아주신씨 대종회에서는 1982년 무렵 종중에서 보관 중이던 신우가 받은 왕지를 영인표구하여 배포하였고 각 신씨 가문에서는 이를 집 안에 게액(揭額)하였다. 이 신우 왕지가 학계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5년 KBS1 ‘TV쇼 진품명품’에 감정 의뢰되면서이다. 당시의 감정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425년(세종 7년) 충주석씨 문중 소장 왕지가 2010년 같은 프로그램에서 5천만원을 받은 것으로 추정컨데 1억대 이상 감정되었을 것으로 자산적·문화재적 가치가 상당히 높은 자료이다. 서지학적으로도 신우 왕지보다 더 이른 시대의 왕지는 현재까지 없는 상황으로 귀중한 학술연구 자료이다.

이 신우 왕지의 보인(寶印)은 왕이 공식적인 문서에 사용하는 인장이다. 그런데 당시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었기 때문에 원나라에서 보낸 ‘부마고려국왕인(駙馬高麗國王印)’이라는 직인명을 [ꡤꡟ--ꡂꡓ-ꡙꡞ-ꡂꡟꡠ-ꡝꡧꡃ-ꡭꡞꡋ]의 파스파(Phags-Pa) 문자로 된 고려왕의 직인을 사용해야 했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인장은 1281년에 충렬왕이 몽골 황제로부터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승상(丞相)의 임명장인 선명(宣命)과 함께 국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인장으로 받은 것을 사용한 것으로 약소국의 설움을 다시 상기케 한다. 정동행중서성은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하기 위해 고려에 설치한 기구로 후에는 고려와 원나라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형식적 관청으로 고려 국왕은 이 시스템의 한갓 기관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서는 교지(敎旨)로 이어져 고위직 관료들에게 조선 국왕의 이름으로 수여되었다.

오늘날 일부 지자체에서 사무관 이상 공무원들에게 교지 형태의 임명장을 수여하는 것이 봉건주의적 사고라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전통 한지에 훈민정음 서체로 직급에 관계없이 모든 공직자들에게 공복(公僕)의 자긍심과 사명감을 갖기 위해 옛 교지(敎旨) 양식의 임명장 수여를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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