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덕초등학교 교감

어렸을 적,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 살았다. 매미를 잡는다며 온 동네를 뛰어다니고, 토끼를 잡겠다며 눈 내린 산을 올랐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40여분을 걸어서 도착한 그곳은 모든 것이 낯선 새로운 세상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종이 울리고, 종이 울리면 정해진 곳에 앉아 공부를 했다. 선생님은 칠판에 정갈한 글씨를 써가며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어주셨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을 따라 읽었고, 네모 칸 공책에 꼭꼭 눌러가며 글씨를 따라 썼다.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어느 순간 나는 혼자서도 글을 읽고 쓰게 되었다.

초임교사 시절 만났던 지훈이는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였다. 오늘 배운 ‘가나다’를 내일이면 잊어버리는 지훈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알고 있던, 정확히는 내가 경험했던 한글 습득 방법을 매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카드로 낱말을 익히고, 한글 음절표를 살피고, 따라 읽고, 따라 쓰고. 읽기 위해서는 우선 글자를 알아야 했었다.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그렇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훈이는 혼자서 읽고 쓸 수 없었다.

초기 읽기 연구에서 사람들은 때가 되면 읽기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읽기 능력은 인간의 신체 발달과 마찬가지로 때가 되면 저절로 발달하므로 특정 연령이 되면 읽기 지도를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특정 연령이 되어도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나타났고, 읽기가 저절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때 나타난 개념이 바로 발생적 문해력이다. 읽기 능력은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문해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조금씩 성장하고 마침내 문자언어를 읽고 쓰는 발달 양상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적당한 발아조건이 제공되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땅 속 씨앗이 뿌리와 싹을 틔우는 모습과 같다. 실제로 발생적 문해력은 태어난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입학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발달한다.

그리고 노출되는 문해력 환경에 따라 그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지기도 한다. 이 발생적 문해력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가정의 문해 환경이다.

생각해보면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여러 인쇄물이 배달되었다.

어른들이 신문 읽는 모습을 보며 자랐고, 글을 몰라도 무슨 내용이 있는지 살피거나 여쭈어보기도 했다.

글씨를 따라 써보거나 누나에게 읽어달라고 했던 기억도 있다. 학교에서 오롯이 글을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가정의 문해 환경 속에서 조금씩 성장했기에 어렵지 않게 읽기와 쓰기를 익혔을 것이다.

나는 지훈이와 공부하면서 지훈이의 가정 문해 환경을 고민해보지 않았다. 지훈이가 집에서 인쇄물을 접해보거나 책 읽기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지, 말로 문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누구와 함께 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지훈이가 어디쯤 와있는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읽기가 가능하다고 믿었고, 나 스스로 그렇게 읽고 쓰기를 배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읽기에 대해 더 알고 있었더라면…….

그때의 지훈이를 더 생각해봤다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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