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공동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시험공부는 잘 했다. 그러나 소심한 성격에 남 앞에서 발표를 잘 못하고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이런 소극적 성격으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크게 걱정되었다. 일기 쓰고, 웅변학원 다니고, 운동 열심히 하면서 성격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술 담배도 조금 하고, 책 하나 안 보고 시험을 치르는 등 반항도 했다. 3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했으나,서울대 갈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재수하려다가, 집안 형편도 어려운 터라, 담임 선생님 추천으로 청주대에 4년 장학생(등록금 면제, 매달 20만원 장학금 지급)으로 갔다. 열심히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서울남부지검 검사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같은 청 검사들 가운데 지방대 출신은 나 혼자였다. 다른 검사들은 가끔 대학 모임을 했는데, 그런 데 낄 수 없는 마음이 무척 허전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검사 일을 하고자 했다. 그 덕분인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1년간 연수를 다녀오고, 서울중앙지검에서 국민참여재판 1호 검사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권위적인 검찰 조직에 몸담는 게 성격에 맞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는 걸 보고, 미련 없이 검사직을 던졌다.

바로 개업하면 전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아내의 권유로, 이걸 포기하고, 변산공동체에 가 농사를 배우고, 정토수련원으로 100일간 출가하여 행자 생활을 했다. 변호사로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통해 민주주의와 생태환경에 대한 나름의 가치관을 남들과 나누고자 노력했다. 여러 시민단체에 가입하고, 촛불집회에 열심히 나갔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기 위해, 가능한 한 학원에 보내지 않고, 산과 들로 많이 데리고 다녔다. 그 탓에(?), 아이들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큰 애는 지방 교대를 나와 선생님이 되었고, 작은 애는 지방대에 다니다 군에 가 있다. 이기적이지 않고 남을 잘 배려한다. 아이들을 서울로 보내지 못한 아쉬움은 거의 없다.

며칠 전, 변호사들 동호회에서 저녁 회식을 했다. 열두 명 정도 모였는데, 한 변호사님의 아이가 수능 본 이야기가 나왔다. 시험을 아주 잘 본 모양이었다. 다들 축하를 보내는데, 이 변호사님은 아이가 의대에 갈 거라고 하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나도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그가 그 말에 이어, 나를 무참하게 만드는 말을 했다.

“지방 잡대는 아니고.”

그 모임에서 두 명 빼고 다 서울서 대학을 나왔다. 그는 그 두 명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순간 분한 마음이 터져 올라왔다. 그도 검사 출신인데, 나보다 한 살 더 많지만 나보다 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서울서 검사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입에서 유치한 말이 터져 나왔다.

“지방 잡대라고요. 서울서 대학 나온 형은, 나보다 먼저 시험 되었나요?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해 보고, 영국에 갔다 왔나요? 참 천박합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옆에 있는 분이 내 입을 막아, 더 이상 실수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방 잡대’라는 말에, 나와 아이들, 내게 장학 혜택을 준 모교 동문 들의 삶이 부정당한 느낌은 며칠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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