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범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배추흰나비
[김영범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배추흰나비
  • 충청매일
  • 승인 2022.11.2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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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소한(小寒) 지나고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한다는 소설(小雪)이 다가오면 집집이 김장하느라 분주하다. 김장은 우리의 고유한 전통이면서 겨울을 준비하는 삶의 지혜다. 최근에는 김치 사 먹는 집이 늘고 김장을 하더라도 상징적인 의미가 커서 많은 양을 하지 않는다.

김장의 과정은 참 번거롭고 힘들다. 가장 먼저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씻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김칫소를 만들기 위한 과정도 만만찮다. 그러니 김치를 사 먹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수고로움을 생각할 때 효과적이다.

김장이 집안의 대소사처럼 여기는 경우는 예전 전통이 남아 있는 농촌이 대부분이다. 시골 출신인 나의 유년에도 이 시기 고향은 김장하느라 집집이 잔칫날 같았다. 워낙 많은 양을 하다 보니 이웃끼리 품앗이하기도 하고 온 동네 어르신이 수육에 갓 버무린 김장김치 올려 막걸리 한잔하는 날이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이듬해 처음으로 6남매의 힘으로 김장을 했다. 아버지가 정성스레 키운 배추를 뽑고 다듬고 절이고 씻고 김칫소 만드는 과정을 스스로 해야 했다. 그전에는 부모님이 다 해놓으면 당일에 와 배추만 버무려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다음에는 각자 하던가, 사다 먹든가 알아서 하자는 말도 나왔다. 가끔 김치를 사다 먹거나 지인한테 얻어먹기도 했는데 어릴 적 먹던 김치맛을 충족하지 못했다.

직접 키운 배추에 맛 좋은 물로 절이고 씻은 김치는 정말 맛있다. 음식은 물맛이 좋아야 한다. 같은 국을 끓여도 시골에서 떠온 물로 끓이면 더 맛있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김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올해도 일찌감치 김장 날을 잡았다. 배추는 언제 뽑고 누가 절일 것이고 김칫소 만드는 일까지 날과 역할을 나눠 공지하며, 형과 누나들은 소풍날을 잡아놓은 이들처럼 흥분돼 보였다. 나는 몇 해 전부터 김장을 하더라도 두통 이상 가져가지 않았다. 집에 김치냉장고도 없을뿐더러 집에서 밥 먹는 일이 별로 없으므로 김치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사 먹는 밥도 물리기 시작하니 예전 엄마가 해주던 집밥이 그리울 때 많아졌다. 올해도 김치통 두 개를 들고 고향으로 간다.

일찍 출발한다고 서두른 것이 늦었다. 아버지가 계신 집에 도착하니 큰누나를 비롯해 형제들은 벌써 김장을 시작했다. 양념이 두통이고 얼핏 봐도 절인 배추가 산더미다. 일찍 와서 양념 버무리는 일이라도 거들었어야 했는데, 누가 버무렸을지 괜히 미안하다. 엄마가 계셨으면 짜내 안 짜내, 새우젓을 더 넣어라, 고춧가루 부족하다, 참견이 많았을 텐데, 엄마 없는 김장에 누구 잔소리가 한 움큼 들어갔을까.

막내가 안쓰러운지 큰누나는 막내 김치통 채우느라 여념이 없고 이런 날도 시누이는 오지 않는다고 둘째 누나는 핀잔이다. 맥주 찾는 소리에 당뇨에 좋지 않다며 매형의 일장 연설이 버무려지고, 손 여섯이 버무리고 버무려지는 김치는 통에 담겨 각자의 자동차 트렁크에 차곡차곡 싸인다.

엄마는 이 모습을 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실까. 김장하는 자식들 보며 흐뭇해하실까. 아니면 맘에 안 들어 잔소리를 하고 싶으실까. 여름내 배추꽃에 앉아 알뜰히, 살뜰히 자식들 먹일 배추 키우느라 또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엄마가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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