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디제라티 연구소장

최근 청주고인쇄박물관이 개관 30주년 특별전으로 2022년 지난 6일까지 전시한 코너에 故 박병선 박사의 생애 업적 연표와 유품 등이 과대 포장됐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이는 직지 편찬자 백운경한이나 출판비용을 모연(募緣)한 묘덕 스님을 비롯한 석찬·달잠 등의 제자들보다 단지 직지를 발견했다는 현대 인물을 지나치게 우상화하였다는 여론이다.

직지의 고장 청주시에서는 박병선 박사에게 직지 발견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1999년 4월 청주시 명예시민증을 수여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9년 9월 은관문화훈장, 2007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 201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서훈(敍勳) 바 있으며 2011년 11월 23일 세상을 떠나자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국가사회공헌자 권역에 안치하는 예우를 다했다.

특히 박병선 박사는 2001년 9월 직지심체요절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일로 그녀의 이명(異名)은 직지대모(直指大母)로 불리어졌다.

박병선 박사를 문화재 발굴의 여신(女神)으로 추앙(推仰)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의 말년은 치적을 앞세웠던 곳에서도 특별한 배려가 없지 않았나 싶다. 그게 아니면 개인 사정인지는 잘 모르지만 자신이 살던 프랑스 파리의 잔 가르니에 병원에서 요양 중 생을 마치게 된다.

박병선 박사에 관한 업적을 평가절하하거나 폄훼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잘못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바로 잡아야 하며, 이로 인해 역사가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박병선 박사의 과대 업적은 이미 상당히 알려져 위인전만도 여러 권이 출판되고, 2019년 8월 27일 제19회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대회에서는 (故) 박병선 박사의 삶과 이야기를 ‘극단 늘품'의 연극으로 공연하는 등 예술 작품에도 등장했다.

박병선 박사가 직지를 찾아낸 것은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주최 <LE LIVRE:책>전시에 출품되면서 금속활자본임을 고증했다고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당시 그녀는 정규직원이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민속학을 전공하여 사서로 근무를 하기는 했으나 문헌정보학이나 서지학 분야에 권위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직지가 세상에 알려진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금속활자 전문가가 극소수였고 미개척 분야였다고 할 수 있다.

직지가 금속활자본으로서 중요함은 일깨운 것은 이를 수집한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와 ‘한국서지’에 수록한 모리스 꾸랑이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또 직지가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최초로 인정한 논문은 1902년에 앙리 비바레(Henry Vivarez)가 발표된 고문서라는 주제에 ‘한국의 고문서’이다, 이 논문에서는 콜랭 드 플랑시의 수집품 중 전시된 직지가 금속활자로 주조된 가장 중요한 인쇄본임을 밝히고 15세기에 주조된 금속활자는 더욱 발전했다고 서술하였다. 그런데 박병선 박사의 직지 금속활자본에 관한 논문은 1976년 국내 학자 등의 논문을 요약 정리한 ‘한국 고대의 활자인쇄’라는 3장의 짧은 논문이 있을 뿐이다.

지금 직지의 편찬한 백운경한 스님의 고향인 전북 정읍시 고부에서는 그 지역의 역사인물로 각종 추모 및 선양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박병선 박사에 대한 막연한 사실로 우상화하기보다는 실제적 연구로 그 가치를 더 빛을 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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