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충청매일] 바티칸의 시스틴 성당에 다녀온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아쉬운 건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보다는 크기나 제작 기간에 주목하는 점이다. 두 그림을 그리는데 도합 10여년 이상의 세월 동안 혼자서 붓질을 하다 보니 목의 통증이나 눈의 질병 등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 그림이 위대한 이유는 아닐 터이다.

‘천지창조’는 구약성서 ‘창세기’를 토대로 폭 14m, 길이 41m 가량의 천정에 그린 초대형 벽화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만든 청동부조 작품을 참고한 것으로 여호와가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이다. 그림 속 여호와는 균형 잡힌 근육질의 백인 남성 노인이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창조해낸 캐릭터로서 인간을 창조한 신을 다시 미켈란젤로가 창조한 셈이 되고 말았다. 청소년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면서 여호와를 가리켜 누구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인 제우스라고 답하였다. 르네상스가 부활을 의미하는 말로서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로의 복고를 추구한 것을 굳이 학술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제단 뒤편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은 등장인물 대부분이 누드로 그려졌는데 나중에 미켈란젤로가 죽은 뒤 그의 제자를 시켜 옷감을 그려넣음으로써 인체의 주요 부위를 가리게 하였다. 도저히 벌거벗은 인체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성모독으로 오인될 만큼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인체의 탐구에 매진한 미켈란젤로의 무모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자유로운 상상을 억압하고 제한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미켈란젤로가 떠올린 대안은 중세 이전의 고대시대였다.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에 의지하지 않고는 제아무리 거룩한 믿음을 지녔다 해도 인간을 감동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배설한다. 미켈란젤로 역시 자신을 느끼고 확인하고 싶은 욕구에 충실하였다. 조각에만 전념했을 뿐 그림을 그려본 적 없는 그에게 천정화를 그리도록 획책한 사람들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켜낼 방법은 이제껏 누구도 보여준 적 없는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예술혼이란 그렇게 자기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예술가의 필사적인 욕망과 집착을 일컫는 말이다.

그로써 미켈란젤로는 타인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독자적인 자아를 욕망하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시스틴 성당의 두 그림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과 집착이 빚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바로 그 곳에서 신과 인간의 매개인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열리는 건 매우 그럴싸한 일이다. 콘클라베는 열쇠로 문을 걸어 잠근 방을 뜻하는 말로 이는 교황이 결정될 때까지 외부와 차단된 채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걸 의미한다. 태초의 이야기 ‘천지창조’와 종말에 관한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여호와도 예수도 아닌 한 인간의 욕망과 번민이 가득한 그 곳이야말로 절로 신을 찾고 신의 뜻에 귀 기울이기 적합한 곳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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