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無心, 마음이 없다는 말, 無心川이라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청주를 관통하며 오랜 세월 유유히 흐르고 흐른, 흐를 무심천.

나의 육체는 진정한 ‘나’가 아니며, 마음 또한 ‘나’가 아니다. 진정한 ‘나’는 육체와 마음이 아닌 다른 존재이다. 그것이 영적 실체이든, 영혼이든, 신이든 ‘나’의 육체를 빌려 현재를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리라. 욕심과 탐욕과 욕망, 시기, 질투, 분노, 슬픔, 우울 이 모든 감정을 벗어던진 사랑과 포용과 평화의 존재가 바로 무심, 무심을 가진 ‘나’ 아니겠는가!

줄지어 달리는 하상도로의 자동차나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무심천과 함께한다.

많은 시인이 무심천을 노래한다. 필자는 권희돈 시인의 시집 『무심천의 노래』에서 무심천에 대한 시인의 애정을 엿본다. 무한한 사랑의 존재인 무심천을 권희돈 시인은 시원이며 탯줄이고, 젖줄이며, 놀이터이며, 배움터고, 휴식처이며, 마음을 정화시키는 사원이고 생으로 연결된 응급실이라 노래한다. 시인은 ‘나’를 고집하지 않고 욕심을 버리고 온전히 ‘나’를 버리고 또 다른 ‘나’가 되는 무심천을 노래한다. 시인은 자연의 이치와 순리를 통해 배우고 익혀 깨달음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그저 보고 또 보는 행위에는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들어있다. 바라봄이 없는 인간의 손길은 끝없는 욕망의 분열, 불안과 공포, 저주와 탄식만이 있다. 사람과 연둣빛 산과 푸른 하늘 사이 욕망처럼 부풀어 올라 벽으로 서는 아파트처럼, 전망 좋은 집에 사는 것이 꿈인 사람들에게 무심천은 인간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시인의 바라봄은 말을 건네고 인사하고 서로 안부를 묻는다.

시인에게 무심천을 걷는 일, 무심천과 만나는 일은 마음을 내려놓는 과정이다. 저 꽃에 사람이 붙인 의미 다 지우고 나서야 저 꽃과 친구가 되는 게 아닐까? 깨닫는 과정이다. 작은 꽃송이 하나하나 우주를 품고 꽃을 피워내는 마음 텅 비어 있음을 느끼는 과정이다.

나이 일흔다섯이 되면 얼굴이 죽음 쪽에 가까워진다는 시인의 노래에 마음 한편이 시리다. 죽음은 인간을 가장 두렵게 만든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인간을 우울하게 만든다. 시인 역시 노년으로 산다는 건, 달의 뒷면처럼 어둡고 차가워서 통절히 아프다고 말한다. 나이 든다는 것은 단순히 죽음에 가까워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의 이치와 진정한 ‘나’에게 한 발 더 다가감이리라. 그리하여 시인은 무심천을 걷고 또 걷고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리라.

달도 없는 밤, 술 취한 귀갓길, 억새가 허공에 비질하던 가을밤, 율량동에서 꽃다리까지, 낙가천 따라 무심천 건너 수영교에서 용평교 원마루시장까지 술 마중하러 바삐 다녔으니 나도 무심천의 반 이상은 걸은 셈이다. 무심천을 얼마나 걸었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나 권희돈 시인의 <무심천의 노래>를 읽으며 나에게 무심천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모르겠다. 시 쓰는 사람 권희돈, 황혼녘 애매미소리로 울고 있는 어린 새를 가슴에 묻고 있는 시인의 심정을 알 수 없다. 땅이 꺼질 듯 울 줄 아는 시인의 깨달음을 헤아릴 수 없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