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국가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 할 만큼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래서 후세 교육을 일컬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만큼 국가의 10년을 넘어 100년 앞을 내다보는 미래의 교육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어서 더 그렇다.

이렇듯, 중요한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의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해 교육에 대한 사명감은 물론, 가르치겠다는 의욕조차 상실한 상태라 할 정도다. 더 이상 질서가 무너진 교육 현장의 문제로 보기에는 도를 넘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더구나 학생의 잘못에 대한 체벌은커녕 손톱 하나 건드릴 수 없는 게 교권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훈계의 말 한마디도 못하는 게 현재 교육 현장의 실정이다.

일부 학부모의 여교사 성폭행은 야만적 행위였다. 2016년 6월 전남의 한 섬마을에서 학부모들이 20대 여교사 성폭행 사건은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자녀를 교육하는 담임 여교사를 성폭행한 사실은 인면수심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이뿐만 아니라 학부모의 교사 폭행을 비롯해 학생들도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아무렇지 않게 폭행하는 사건은 비일비재했다. 이런 문제는 교육 현장에 민낯의 현주소다.

현재의 교육 현실을 볼 때, 교권 추락과 함께 학생들에 대한 교육적 차원의 관리는 도를 넘어 한계치 수준이다. 교사로서 교육에 대한 사명감보다는 단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봉급을 받는 월급쟁이에 불과하다 하겠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교권 추락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승이 되고 싶은 선생님은 많지만, 교육 현장의 실정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결국 ‘스승’이란 개념은 학생들에게는 무의미한 존칭어에 지나지 않는다.

잘못된 교육정책에 의해 교사와 학생 간의 신뢰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추락했다. 교사로서 교육에 대한 의무감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전이다. 새로운 교육정책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항상 정권이 바뀌면 교육정책도 따라 변해왔다. 교육만큼은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지속성을 갖춘 현실적 교육이 필요하다. 정권이 바뀌고 교육부총리가 교체되어도 교육 수혜자인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조변석개(朝變夕改) 식의 일관성 없는 교육정책은 지양되어야 한다.

박순애 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처럼 느닷없이 6세 초등학교 입학 나이를 5세로 낮추겠다고 발표해 학부모들에게 혼란을 주는 황당무계한 교육정책은 두 번 다시 나와서는 안 된다.

나라를 위해 백년 인재를 키우는 게 교육이다. 학교에서의 학생 교육은 오직 교사만이 할 수 있는 몫이다. 누가 뭐래도 학생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선생님들이다. 특히 학교는 엄연히 집단생활의 규율을 지켜야 하는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요람이다. 그런데 이런 교육 장소에서 버젓이, 그것도 담임이 열심히 가르치는 공부 시간에 교육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행동을 한다면 당연히 교사의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게 학생의 신분이다.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가르침 속에 회초리가 빠지지 않았다. 잘못의 반성과 깨닫게 하는 교육적 목적으로 회초리를 사용했다. 가르침의 의욕이 상실되는 교권 추락, 더 이상은 안 된다.

교사는 자신보다 나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제자를 육성하는데 목적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는 현장 교육의 혁신만이 교육을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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