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만 8년이다. 충북연구원의 수장으로 8년간 지휘하던 정초시 원장이 그저께 퇴임했다. 32년의 충북연구원 역사상 가장 오래 원장을 역임했다. 연구원의 운영은 연구원 내부뿐만 아니라 도와의 관계도 중요한데, 그만큼 잘 조율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원장이 부임할 당시(2014년 9월) 충북연구원은 전국 최초의 지방연구원이라는 명예에 걸맞지 않게 많은 내적, 외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전국 14개 광역시도 연구원들은 겉으로는 독립된 기관처럼 보이지만, 광역시도에서 예산을 받는 출연기관이기에 약자(을)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연구기관이라기 보다 지원기관 또는 연구과제 대행기관의 성격을 버리기 힘든 특성이 있다.

충북연구원도 마찬가지였다. 전국 최초로 설립되었음에도 충북도의 예산과 정치적 역량 등의 영향으로 연구원의 인력, 예산, 조직 구성 등이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 많은 원장들이 개선을 위한 노력을 했으나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정 원장이 부임할 때도 그랬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청주시가 유해화학물질 배출량 1위이고 산업단지 인근 주민들이 위험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후, 외부로부터 많은 압박을 받을 때였다. 외부의 압박은 내부에서 징계로 이어졌고, 결국 노조를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이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문제를 정 원장이 부임해 풀어줬다. 사건의 진위여부를 떠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그의 삶의 철학 덕분이었다.

그의 공동체 철학은 연구원 운영에서도 나타났다. ‘머리만 굵은 박사’들이라는 말처럼, 자기 분야에 지식만 많은 박사들의 집단은 함께 뭉치기가 매우 어렵다. 연구원도 그렇고 대학도 마찬가지다.

군대에서 깍두기 반찬으로도 싸우듯이, 아주 사소한 것으로 다투고 시기하고 외면하는 집단이 ‘머리만 굵은 박사’들이 모인 곳이다.

서로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비판하며, 남의 말은 잘 듣지 않는다. 필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연구원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 원장은 이런 무모한 시도를 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포기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여리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이에 저항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전공분야가 다른 사람들이 공동으로 같은 분량의 책임을 지는 ‘창의과제’는 초기에 우왕좌왕했다. 박사들은 개인 자격이 아니라, 충북연구원에 속한 일원으로서 과제를 수행하기에 책임과 성과도 같이 나눈다는 경영방침도 큰 벽에 부딪혔다. 물질 자본주의와 개인의 욕망, 그리고 경쟁사회 속에서 내 것을 나눈다는 것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문제도 저항에 부딪혔다. 정규, 비정규직 모두 한 가족이라는 경영방침에도 불구하고 관습적으로 차별하고, 차별 받아온 비정규직의 처우는 오랜 시간이 지나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공동체를 향한 정 원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사들 집단은 더디게 바뀌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필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8년 전과 지금은 수치화 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6년 연속 기관평가 1위라는 성과 이외에, 충북연구원에는 정초시 원장이 뿌려놓은 씨앗이 자라고 있다. 그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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