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지인의 추천으로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봤다. 무거운 분위기의 드라마였다. 드라마를 시종일관 관통하는 평범하지 않은 두 단어, ‘해방(解放)’과 ‘추앙(推仰)’이 주는 어감과 주인공들의 삶이 가볍지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한참 패러디되었던 ‘나를 추앙해요!’는 참 뜬금없고 어색했다. ‘나를 좋아해줘요, 나를 사랑해줘요’라는 말조차도 요구형으로 사용하면 어색하고 당돌한데, 추앙하라니?

필자는 이 장면에서 잠깐 드라마에서 튕겨 나와서 작가의 실수를 의심했다. 몇 회를 더 본 후에야 미정에게 왜 사랑이 아닌 추앙이 필요했는지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말수가 적고, 일밖에 모르는 부모 밑에서 막내딸로 태어난 미정은 귀여움과 사랑보다는 책임감을 떠안고 성장했다.

티격태격 싸우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언니와 오빠와는 달리, 미정은 답답하리만큼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힘든 싱크대 만드는 아버지의 일을 군소리 없이 잘 도와주면서 전형적인 착한 딸로 자랐다. 그런데 사실 이런 착함은 진짜가 아니다. 그리고 그 착함이 그녀의 삶을 구속하고 만다.

부모에게 갖고 싶은 것 제대로 요구하지 못하면서 자란 착한 미정은,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말 한마디,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한다. 상사나 동료들도 이것을 이용한다. 어느덧 ‘미정씨는 저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인식된 것이다. 미정은 불합리한 대우를 알면서도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런 성격의 미정이 상대에게 사랑도 아니고 ‘나를 추앙해요!’라고 요구하다니?

며칠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기쁜 목소리로 필자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인은 지난해부터 직장을 그만두는 결정을 두고 불안한 마음이었다. 지인은 그러고 보니 드라마의 미정과 많이 닮았다. 아버지가 싱크대 공장을 했던 것, 자신의 진짜 욕구를 모르는 것, 그리고 외모와 표정까지도 미정과 비슷했다.

두 딸의 양육과 가정을 위해 퇴직을 결심한 후로 무겁고 불안한 마음이 계속되었는데, 최근에 이 무거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아서 너무 기뻤고,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구속됨에서 해방된 것이다.

드라마의 제목이 왜 해방일지였는지 후반부에서 이해되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원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에 구속되어 살아간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말이다. 착하게 사는 것도, 대부분 그것밖에 선택할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선택한 ‘착함’이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드라마 작가는 해방된 삶을 위해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 방법이 자신만의 해방일지를 쓰는 것이었다.

필자도 해방되어야 할 것이 많다. 돈, 사회적 인정, 타인의 시선, 종교적 가면 등이다. 이 구속들은 어린 시절 사랑의 결핍에서 온다고 한다.

성인이 된 지금, 사랑만으로 이 결핍들이 채워지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미정은 추앙을 요구했다. 그들은 서로를 추앙했다. 현실의 우리는 무엇을 추앙해야, 또 추앙받아야 결핍이 채워질 수 있는 것일까? 땅의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을 추앙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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