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다급하고 초조했다. 어떻게든 이곳을 서둘러 빠져나가야 한다. 빈 물동이를 머리에 인 그녀는 사공에게 ‘누가 쫓아 올 터이니 입을 다물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강을 건너 한양을 벗어났다. 그녀의 머릿속엔 물동이 안에 들어있는 아기의 안위뿐이었다.

노비 삼월이는 그렇게 강을 건너 오창 양지리로 향했다. 목령산을 뒤로 하고 남쪽으로는 미호강이 넓은 들판을 내달리는 배산임수의 좋은 터에 양지리가 있다. 기름진 터는 여러 성씨의 세거지였다.

물동이 안에 들어있던 아기는 청풍 김씨 김후의 손자 김윤(金潤)이었다.

삼월이의 남편은 김윤이 유복자로 태어나자 가문의 재산을 탐하였다. 이를 눈치챈 그녀는 약간의 재산을 챙겨 김윤의 진외가인 양지리로 찾아든 것이다. 하마터면 대가 끊길 뻔하였다. 청풍 김씨 문중에서는 삼월이의 공덕을 기리는 ‘충비 삼원지비(忠婢 三月之碑)’를 세웠다.

삼월비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내가 사는 이웃 마을에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을 줄이야. 송천서원에서 병천 가는 방향으로 첫 번째 마을로 들어섰다. 삼월비를 찾기 전, 전의이씨세장비(全義李氏世葬碑)가 먼저 눈에 띄었다. 노비의 비는 이보다 아래에 있거나 외진 곳에 있으려니 했다.

고개를 들어 목령산 철탑이 보이고 그 아래 중턱에 묘지 같은 것이 보였으나 설마 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삼월비가 보이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철탑이 있는 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푹푹 찌는 더위에 얼굴에 비지땀이 줄을 타고 내려와 턱 밑으로 뚝뚝 떨어진다. 아무러면 삼월이의 고충만 하랴. 헐떡이는 숨을 잦히려 고개를 들어보니 과연 삼월비였다. 잘 정돈된 잔디 위로 오후 햇살이 내비친다.

청풍 김씨의 대를 잇게 해준 노비 삼월이의 충성도 귀감이지만 고마움을 기리는 후손들의 손길이 흐뭇하다. 다만 죽어서도 노비의 신분을 벗지 못했으니 마음이 아릴 뿐이다.

삼월비에서 내려와 두릉유리로변에 김호철, 김호열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청풍 김씨 쌍효정려(淸風金氏 雙孝旌閭)가 있다. 이런 훈훈한 이야기와 가문의 역사가 이어져 전해지는 것은 아마도 인·의·예·지·충·효를 중요시한 풍토와 이를 바탕으로 한 교육의 힘이었으리라. 근처에 있는 송천서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소박한 맞배지붕의 건물에 강의실이 궁금하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마당엔 잡풀만 무성한데, 굳게 닫힌 옥색 문살이 마음을 잡아끈다. 오랜 세월 유생들의 발걸음이 목령산 정기를 타고 분주했으리라. 입신양명에 뜻을 둔 젊은이들에게 인성 교육보다 우선인 것이 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배움과 교육에 대한 열망은 변함이 없는데 왠지 씁쓸하다. 송천서원에서 수학하여 입신양명한 사람도 적지 않겠으나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을 바탕으로 학문을 닦았으니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여 치국(治國)하였으리라. 주말인 오늘도 오로지 수능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 우리의 청소년들을 생각한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최종 목표는 아니건만…. 목령산 산바람이 양지리에 닿는다. 충(忠)과 효(孝)의 숨결이 그곳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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