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희/ 청주시 경덕초 교감

단톡방에 몇 달 만에 번개 공지가 올라왔다. 타지에 살고 있는 친구가 오랜만에 고향에 온다는 소식과 더불어 번개가 소집되었다. 17명 동기 중에 고향보다 타향에 있는 사람이 훨씬 많음에도 번개는 대부분 고향에서 이루어진다.

대학 시절에는 방학에 집중해서 만나다가 직장인이 된 후에는 명절 중심으로 만났고 결혼 시기에는 전국 여기저기로 몰려다니며 만났다. 나 또한 결혼 전에 남편을 이 모임에 소개했다. 이 모임의 구성원, 역사, 성격 등에 대해 사전 교육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녀 구분이 어려운 중2 쉬는 시간 같은 혼성 그룹의 발랄함에 남편은 정신을 잃었었다.

우리는 한 시절 매주 일요일 새벽 6시에 모였던 고등학생들이었다. 남녀공학이 드물던 당시에 여고, 남고 학생으로 구성된 연합 동아리는 더욱 흔치 않았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남녀 고등학생이 정기적으로 회합을 갖는 것에 대한 불온한 시선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 아카데미의 소속이라는 방어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마다 지도교사가 있었지만 회원 가입은 주로 선배들의 낙점으로 시작되었고 도제식 수습과정을 거쳐 정식 단우(團友)가 되었다. 독서토론, 발표, 교내모임, 연합모임, 동계·하계 수련회 등 거의 매주 행사가 있었고 우리는 단소(團所), 학교, 친구집 등에서 만났다.

대학생이나 직장인 선배들이 자주 왔었고, 그들은 1박2일 수련회까지 따라와서 어려운 말로 일장연설을 하거나 세상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어설픈 토론과 장난 같은 진지한 회의를 했고, 자주 삐지고, 싸우고, 복잡하게 이리저리 사랑의 화살도 쏘아댔다.

그중에서 매주 일요일 오전 6시에 있었던 조기 수련회가 기억에 남는다. 조기 수련회 장소는 우리 집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떨어진 외곽의 공원에 있어서 5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서너 명의 손님을 태운 새벽 버스에서 내려 매일 등교하는 여고를 지나고 영업 전인 문방구와 분식집을 지나 언덕 위의 공원에 오르면 안개를 덮고 자는 듯한 동백섬과 비릿한 바람이 먼저 와 있었다.

모인 친구들과 3분 스피치, 윤회악수 등의 40분 남짓의 루틴을 하고 내려가면 늦잠 자서 이제야 헐레벌떡 뛰어오는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선배가 쏘는 햄버거를 얻어먹으러 가기도 했다.

과거의 경험은 기억이라는 형태로 뇌에 저장되지만 그 기억은 뇌 전체에 걸쳐 극히 적은 수의 뉴런들에 인코딩되고 저장된다고 알려져 있다. 행동과학자 닉 체터가 오늘의 기억은 어제의 해석일 뿐이라고 말한 것처럼 기억이란 마치 우리가 숲을 가꾸듯이 의미 있게 여긴 것을 선택하고 강화하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카데미 친구들과의 모임은 서로 다른 기억과 해석의 전쟁이다. 발표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하계 수련회 때 누가 사고를 쳤는지, 누구랑 누가 썸을 탔는지, 최근 관광지로 뜨거워진 고향의 그 공원이 당시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등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기억은 다르고, 해석은 더욱 다르다해도 내 인생에서 그렇게 오랜 기간 새벽길을 홀로 걸었던 적은 없었다. 그냥그냥 그랬던 그 새벽이 미래의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지 모른 채 몇 번의 계절을 몰입하고 몰두했다. 그저 그랬던 새벽은 이제 약간의 깨달음과 민망함, 소량의 뿌듯함과 그리움 등으로 변환되어 나의 뉴런 어딘가에 퍼져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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