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촤르르 쏴아…. 처마 밑으로 파고드는 소나기가 옹송그레 일어선 솜털 사이로 끈적한 열기를 가셔낸다. 양재기를 꺼냈다.

냄비에 멸치를 넣고 감자를 어슷하게 썰어 국물을 낸다. 가뭄에 유난히 힘들어했던 감자다. 밭두둑이 딱딱하게 굳고 잡풀마저 생장점을 키우지 못했다. 감자꽃이 피고 한참 몸피를 부풀려야 할 때 한 달 이상을 비가 내리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호스를 끌어다 한두 시간씩 물을 댔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한줄기 비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저러 겨우 캐낸 감자니 어찌 애틋하지 않으랴. 펄펄 끓는 물 속에 들어서야 겨우 긴장이 풀리는가 푸슬푸슬 제 몸을 부스러뜨린다.

양재기에 통밀가루를 넣고 적당량의 물을 부은 다음 이리저리 치댄다.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시던 수제비는 반죽을 질게 해서 한 주걱 떠낸 다음 젓가락으로 뚝 뚝 삐져 끓는 물에 넣었다.

오늘은 그보다 되직하게, 칼국수보다는 부드럽게 하여 검지와 장지로 반죽을 얇게 벌려 뚝뚝 떼어 넣는다. 거무튀튀한 통밀 반죽은 영락없는 농군의 얼굴빛이요, 쫀득쫀득한 식감은 찰진 인정이다. 크기도 제각각, 두께도 제각각, 떼어낼 때마다 모양도 제각각이니 틀에 박히지 않은 여유라고나 할까? 규범을 벗어난 자연, 무위(無爲)의 경지다.

감자가 익어가고 수제비 반죽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하면 반달 모양으로 썬 애호박과 결 따라 잘라낸 양파를 넣는다.

살이 연한 애호박이 칼날이 지난 자리에 송글송글 땀방울을 맺는다. 저도 긴장이 되나 보다. 하지만 뜨거운 육수에 들어가면 이내 안정을 찾고 유들유들 노랑과 연둣빛으로 생기를 돋운다.

세상에 양파만큼 솔직한 것이 또 있을까? 애초부터 의뭉스럽지 않았다. 밭에서도 몸피가 불어나면서부터 땅 위로 온전하게 몸을 다 드러냈다. 땅속에 몸을 숨긴 마늘이나 감자와는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몸집이 다 자라면 꼿꼿하게 서 있던 잎을 스스로 누여 고단한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한다. 껍질을 까고 또 까도 새로운 것이 나올 게 없다.

사람들은 자신을 낮추어 드러내지 않는 것을 겸손이라 하지만 양파처럼 오롯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겸손이지 않을까? 솔직하면 남을 기만할 일이 없으니 겸손에는 솔직함이 우선이다.

불을 낮춘다. 냄비 속에서 저들끼리 소용돌이치며 끓는 것은 소란이 아니라 화합이다. 시원하고 구수한 맛을 위한 춤사위다. 다진 마늘과 파를 넣고 계란도 풀어 넣어 마지막 호흡을 맞춘다.

사실 수제비 맛이라야 특별한 향이 있는 것도 아니요, 자극적이지도 않다. 저마다 자신의 맛을 드러내지 않는다. 잘났으나 못났으나 저 잘난 맛에 사는 우리네와는 다르다.

별나지도 귀하지도 않은 소박한 맛에 끌리는 이유가 뭘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멸치, 감자, 양파, 호박, 고추…. 오성급 호텔에서 고샅길 접어든 할머니 집까지 어딜 가나 흔하디흔한 식재료다.

독특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름 아린 맛, 매운맛 저만의 맛을 갖고 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어울렁더울렁 제 모습 뭉개가며 자신을 낮추니 귀한 음식 아니어도 귀히 여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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