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성낙인 옹은 ‘조선의 궁술’에서 현실로 막 걸어 나온 그런 분이었습니다. 마치 쥐라기나 백악기의 지층에 흔적으로 남은 시조새가 우리 집 아파트 주차장으로 날아드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예컨대, 과녁에 대해서 여쭈었습니다. 옛날에 과녁 거리는 지금과 비교할 때 어땠나요? “조금 더 멀었지.” 과녁 모양은요? “옛날에는 검정관만 있었어.”

대화할 때마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말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기억을 좀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해방 전후에 집궁한 구사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 분들이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무언가에 쫓기는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살아온 과거에 대해 과장이나 허세를 떠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좀 그럴 듯하게 부풀리려는 성향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이럴 때 채록자는 대담자의 이런 태도를 가장 경계해야 함을, 저는 국어학을 전공하면서 익히 아는 바이기에 이 점을 특히 유념하며 구사들을 대했습니다.

그런데 성낙인 옹은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아는 것에 대해서는 간단명료하게 답하고, 모르는 것에 대하서는 딱 잘라서 <모른다>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컨대 ‘조선의 궁술’ 속 사법은 누가 썼느냐는 물음에 성 옹은 “선친이 쓰셨어.”라고 간단하게 답하셨습니다. 저는 이 대답의 진실성을 믿지만, 문제는 이 말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성 옹이 입산하고 그의 유품을 받아들었을 때, 임창번이 쓴 성문영 공 조사에 그런 내용이 있음을 알고 정말 소름이 돋았습니다. ‘성낙인 옹의 말씀은 단 한 구절도 거짓이 없구나!’ 하는 확신이 들며 새삼 성 옹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이 강해졌습니다.

그런 분이 기억하는 편사 이야기는 정말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편사를 연구하는 사람도 없지만, 혹시 누군가 연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선의 궁술’ 속 편사를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려고 정리를 해보니 당사자에게 묻지 않으면 알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조선의 궁술’에는 편사 당일에 각 정으로 아침상을 보낸다는 얘기가 있는데, 성 옹의 얘기를 들으니 자신이 참가할 때는 그런 거 없었고 아침은 각자 알아서 먹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성 옹이 기억하는 편사는 ‘조선의 궁술’에 묘사된 가장 성대했던 시절의 얘기가 아니라 많이 간략해지고 간편해진 시절의 편사임을 알 수 있었고, 또 그것이 그 나름으로 전통문화로서 가치를 지닌 것임을 판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의 궁술’ 속 편사가 아니라 성낙인 옹의 편사를 추진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서울 터편사의 형식을 우리가 추진할 때 ‘온깍지 편사’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온깍지 편사’는, 서울 터편사를 오늘의 실정에 맞게 실시하는 편사입니다. 곧 성낙인 옹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편사입니다. 해마다 봄에 실시되는 이 온깍지 편사는 ‘전통 활쏘기’에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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