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희/ 청주시 경덕초 교감

페추니아가 사라졌다고 눈 밝은 아이들 몇몇이 와서 물어왔다.

붉은 단심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뿜어내었던 페추니아가 졸업한 텅 빈 화단은 식구 많은 가족이 서둘러 이사 나간 전세방처럼 휑하였다.

며칠 후 화단에는 어린 국화들이 갓 입학한 신입생 같은 이름표를 달고 의기양양하게 심어져 있었다.

그 동안 페추니아의 한살이를 도왔던 여러 손길들은 어린 국화에게로 옮겨가 그들이 노랗게 철드는 과정을 채울 것이다. 마치 학교 교육처럼 말이다.

아침이면 1리터짜리 생수병을 책처럼 옆구리에 끼고 한 줄로 선생님을 따라가는 학생들이 향하는 곳은 방해 없이 일조량이 풍부한 학교 후관 뒤였다.

오밀조밀 정성 들인 아지트 같은 정원을 가꾸느라 머리를 맞댄 학생들의 무아지경을 바라보는 김 선생님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부모도 몰랐던 학생의 난독증을 발견한 이 선생님은 덤덤한 얼굴로 치료지원비를 신청했고, 5월이 되도록 겨울 패딩을 입고 오는 학생의 부모 상담을 위해 퇴근 후 학교로 다시 들어오는 박 선생님의 콧노래는 어두운 복도를 밝혔다.

학생자치회에서 결정한 학급별 물총놀이를 위해 정 선생님은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 한쪽에서 조용히 물통을 채웠다.

최근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에 대한 축하와 감탄이 많다.

그가 금수저에 꽃길만 걸었던 것이 아니라 부적응과 좌절의 가시밭길도 오래 포복했던 시간 덕분에 영광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부 신문과 방송에서는 암기 중심의 경쟁적인 한국의 공교육에서는 제2의 허준이 교수가 나오기 어렵고 수포자만 양산한다는 비난을 한다.

경쟁적인 공교육보다 허준이 교수 같은 성취자와 수많은 미성취자를 단순 비교하는 경쟁적인 관점이 보다 위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옆집의 공부 잘하는 아이와 우리 아이는 비교가 가능한 존재인지 그리고 옆집 아이와의 비교와 경쟁은 우리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인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다. 문해력수업, 더배움수업, 수학캠프, 창의놀이, 여름참새방앗간(위클래스), 비경쟁스포츠수업, 방과후수업 등이 짧은 방학을 채울 예정이다.

기초기본 학력과 더불어 다양한 경험이라는 두 개의 날개가 있어야 비로소 진짜 실력으로 비상할 수 있다고 믿으며 학교는 분주하다.

‘한 사람을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이는 한 사람의 성장에 필요한 수많은 연결고리가 걸려 있음을 비유하는 말인데 반해 실패와 문제를 지적할 때는 유독 하나의 고리 탓만 하는게 아닌지 나는 난처하다.

며칠 전 흠모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품위있는 형사 박해일이 탕웨이에게 한 대사가 잊히지 않는다.

“내가 품위 있어서 좋다고 했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 자부심에서 나와요.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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