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테라피 강사

당장 뇌리에서 지워버리고, 아니 영원히 기억하지 않고 싶은 일이 있나요, 누군가가 물어온다면? 너무도 선명하게 뇌리 깊숙한 데 박혀 삶을 힘겹게도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잊기 어려운 어려운 일들을 마주치게 되고 그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한다. 잊지 못해서만 괴로울까, 기억이 사라져버리는 난망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일까.

깊은 인간애와 시적 상상력과 섬세하고 감성적인 그림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이탈리아 작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의 ‘사라지는 것들’이란 그림책이 있다. 세상엔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지저귀던 새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낙엽이 진다. 음악 소리는 금세 허공으로 사라지고 비눗방울도 그렇다. 눈에 보이는 것들 외에 우울한 생각 두려운 마음 같은 감정들도 언젠가는 사라지거나 변하거나 휙 지나가 버린다고 한다.

이 책의 메시지가 어떠하든 사라져서 끝나지 않고 어딘가로 연결되어 다시 살아나는 것들에 시선이 간다. 정말로 사라져서 영원히 내 생애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생각하며 작가의 재미있고 기발한 표현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트레이싱이라는 반투명용지에 사라지는 것들이 그려지는데, 그것이 앞장으로 넘겨지면서 전혀 다른 상황으로 변하기도 하고 정말로 사라지기도 한다.

풍성했던 머리카락은 누군가의 콧수염으로 변하고 찻잔에서 사라진 김은 컵케익 위의 달콤한 휘핑크림이 된다. 이렇듯 세상 모든 것들이 의미 없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전달한다. 털어내도 자꾸만 생기는 먼지는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사라졌다가도 또 나타나는 게 당연한 자연 이치일 것이다.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도 않기 바라는 것들도 있을까? 작가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은 듯하다. 물론 보편적인 결론에서 좀 더 확장된 사랑, 책 표지에서 사라진 꽃씨가 가져다줄 또 다른 세상을 그려낸다. 그렇지 못한 현실의 안타까움도 더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들의 일회성이 아니라 생성되면 소멸하는 자연의 이치를 안다고 우리 삶이 더 풍성해질까? 사라지는 것들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하니까 인생을 멀리 넓게 본다면 그리 슬퍼하거나 기뻐할 것은 아닐지 모른다. 가슴 깊이 박혀있는 상처들은 없앨 수는 없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 고통을 지혜로 바꿀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사랑으로 구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고통은 그걸 넘어 의미있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작가가 그린 것처럼 사라져버리게 하고 싶은 것을 트레이싱 용지에 그려보고, 옆 장에는 그럼으로써 나타날 효과를 그려넣고 기대한다면, 그래서 잊혀지고 내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즉시라도 해볼만 하겠다. 그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가슴 속 깊은 데 숨어있건 삶에 족쇄처럼 달라붙어 있다면, 때때로 떠올라 속상하거나 잊지도 못하게 수시로 괴롭혀 대는 기억이건 벗어나야 살아가지 않겠나.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자기 앞의 생이기 때문에 우선은 살아갈 힘을 회복하기 위해, 더는 삶을 아름답게 살아내도록 힘을 내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보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면.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