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중산고 교감

내 고향마을은 충주 달천강가의 송림마을이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면 온통 달래강과 함께 한 기억으로 가득하다. 남한강과 합류하는 달래강가의 고향마을은 강둑을 따라 일자형으로 형성된 마을이었다.

대홍수가 나던 1972년, 나는 어머니의 고향인 이 마을로 이사와 윗마을에서 아랫마을로, 단칸 셋방에서 낡은 기와집으로, 수없이 옮겨다니며 살았다.

여름이면 친구들과 강에서 물장구를 치고, 겨울이면 썰매를 타며 자랐다. 강둑에 서서 강물과 강 건너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모시래 들녘의 곡식처럼 여물어갔고, 차갑고 시린 겨울강바람을 맞으며 험난한 세상살이를 헤쳐가는 법을 배웠다. 부모님은 머리맡에 새벽밥을 지어놓고 들녘으로 일하러 나가 캄캄한 저녁이 되어야 들어오셨다. 우리 형제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의 먹이를 주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부모님을 기다렸다.

누구나 가난하고 먹고 살기 바쁜 세월이어서 가족여행을 가거나 자녀교육에 열을 올리는 집은 없었다. 아이들은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노는 것도, 공부도, 고민도, 스스로, 또는 친구들과 알아서 해결했다. 형제들이 많아서 스스로 밥을 챙겨 먹지 않으면 내 몫은 남아있지 않았고, 형제나 친구들과 다투고 때로는 양보하며 원하는 것을 얻는 법을 터득했다.

마을은 언제나 들썩거리는 분위기였다. 여름밤 강둑에는 또래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기타를 치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모두들 제 나이에 맞는 방식대로 재미있게 놀았다. 겨울이면 이집 저집 사랑방에 모여 화투를 치거나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를 마치면 스스로 돈을 벌고 독립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모두들 공부에 전념하거나 일찍이 기술을 배우러 떠났다. 누군가를 짝사랑하기도 하고, 누가 누구랑 사귄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마을에 흉측한 일들은 없었다.

정월대보름이나 명절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마을회관 앞 공터에 나와 척사대회도 하고, 노래자랑도 하면서 함께 즐겼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어 어울리며 예의도 배우고, 누군가 빼어난 노래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서로서로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듯 보였지만, 모두가 끈끈하고 단단한 정으로 둘러싸인 울타리 안에서 소중히 자라고 있었다.

한 세상을 살고 보니 정해진 규칙은 없었지만 공동체가 아이들을 건강하게 길러냈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 모두 학교를 졸업하고 큰 도시로 떠나 밥벌이를 하며 제 앞가림을 잘하고 살았다. 모두들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잘 길러냈다.

고향 마을이 아이들에게 자연스레 가르친 것은 자립심이었고 협업하는 능력이었다. 먹고 살기 바쁘고, 누구나 다 아는 눈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외로울 틈도 없었고, 엇나갈 수도 없었다. 반 세기 전 고향은, 인터넷으로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 학원에서 돈을 주고 배우는 세상은 아니었지만 험난한 세상을 헤쳐갈 힘과 지혜를 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없이 흐르는 달래강가에서 함께하던 그 시절 그 때의 고향 사람들이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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