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성낙인 옹이 중요한 인물인 또 다른 이유는 서울 편사를 체험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서울 편사는 해방 전까지 생생하게 살아있던 풍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규모나 격식은 많이 졸아들었지만, 해방 후까지도 간간이 열렸던 행사입니다. 그 풍속이 ‘조선의 궁술’에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그 기록의 현장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기에 그의 존재 자체가 편사의 생생한 증거인 셈입니다.

때로 천 년의 전통이 한 사람에게 달린 경우가 생깁니다. 예컨대 태껸의 송덕기 옹이 그런 경우입니다. 송덕기는 구한말 군인 출신으로 평생을 서울 황학정에서 활량으로 삶을 마친 사람입니다. 이 분이 격구, 태껸, 활쏘기를 했습니다. 태껸은 겨우 이어졌지만, 격구는 송덕기 옹의 죽음과 함께 그 전승이 끝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천년의 전통이 송덕기 옹의 죽음과 함께 끝장난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우려 때문에 나라에서는 무형문화재 제도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으로 압니다.

참고로 성낙인 옹도 송덕기 옹을 아주 잘 알더군요. 실제로 해방 전에 집궁한 성낙인 옹은 한 동안 송덕기 옹과 함께 활을 쐈고 자신이 사진도 찍어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자기 자랑인가보다 하고 한 귀로 흘리고 말았는데 성 옹의 유품 속에 실제로 송덕기 옹의 멋진 궁체 사진 필름이 2장 있어서 그것을 송 옹의 제자인 결련태껸 도기현 회장에게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성낙인 옹이 기억하는 송덕기는, 몸집이 좋았고 그래서 자신의 선친 성문영 공이 어디 외출할 때 보디가드 겸해서 늘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특히 개성편사에 갈 때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몸집 좋은 송덕기를 대동하고 갔다고 합니다. 편사를 하는데 왜 덩치 좋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경기도 지역의 다른 원로 구사들을 만나면서 얘기 들어보니 편사를 하면 단순히 활을 쏘는 것만이 아니라 동네 전체가 총동원되었다네요. 까닭인 즉슨 판정에 시비가 붙으면 때로 몸싸움도 일어나곤 했답니다. 그래서 씨름꾼 같은 동네의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곤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성문영 공은 송덕기를 이런 차원에서 특별히 귀하게 대했던 듯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문영은 무과 출신으로 하급 군인이었던 송덕기의 직계 상관이었고, 평생 사두로 모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분의 아들이 활을 배웠으니, 어린 성낙인에 대한 송덕기의 애정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태껸은 현재 세 문파로 나뉘었습니다. 충주의 신한승에게서 배운 정경화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상태이고,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도 등재된 상황입니다. 반면에 송덕기 옹에게 웃대 태껸을 배운 도기현이 이끄는 결련태껸도 있고, 대한체육회에 등록되어 활동하는 대한태껸도 있습니다. 이 밖에도 김영만 접장은 전 세계를 돌며 태껸의 원형을 찾는 어려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송덕기 옹의 제자 중에서 미국을 비롯하여 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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