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가끔은 바람이 나는 것도 좋겠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에서 한 번쯤 벗어나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다. 문화제조창에서 하는 2022 한국공예관 기획공연 ‘안덕벌 랩소디:추억을 피우는 공장’이라는 타이틀의 창작 오페라 공연을 볼 기회가 생겼다. 오랜만에 나서는 저녁 외출은 나를 달뜨게 한다.

바로 전날 사진전을 관람하러 왔었기에 어렵지 않게 공연장을 찾을 수 있었다. 평일인데도 낮에 왔을 때보다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서 한편 놀랍기도 했다. 예약을 확인하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섰다.

공연이 시작되자 발레리나의 우아한 춤사위에 이어 공장에서 부서마다 근무하는 직원들 모습이 보인다. 푸른 유니폼을 보니 어렸을 적 언니들 모습이 어렴풋하다. 연기자들이 모두 함께 부르는 ‘연초제조가’가 우렁차다. 당시의 社歌였을까. 사가는 직원들에게 애사심을 갖게 하고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있으니까 그때도 아마 있었을 것이다. 연초제조가를 듣는 내내 내가 마치 직원인 양 왜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지.

월급날이면 안덕벌 주변에 시장이 생길 정도로 지역경제를 쥐락펴락 했다고 들었다. 월급날 외상값에 시달리는 사람, 술에 전 사람, 동생 학비 걱정하는 사람들, 시끌벅적 왁자지껄 …. 요즘처럼 자동으로 이체되어 숫자로만 느끼는 급여가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허무가, 어떤 이에게는 꿈과 희망이 고스란히 담긴 월급봉투다. 손으로 두께를 가늠해보고, 뒤돌아서 남몰래 슬쩍 들여다보고, 다시 또 한 달을 기다리는 희망 봉투다.

술집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외상값을 독촉하고 쪼들리는 생활에 ‘주네, 마네’ 실랑이가 벌어지는 장면도 익숙하다. 바로 얼마 전 일 같으니 말이다. 카드로 결제하는 요즘에야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신용카드가 결국 외상 장부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6·25 전쟁 후 가족을 잃어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많았다. 다랭이논이었던 안덕벌에 담배 공장이 세워지고 연초제조창은 진흙창 같은 그들의 삶에 꿈과 희망의 제조창이었다. 당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연초제조창에서 정순과 범태의 사랑 이야기는 할머니가 된 정순이의 실제 이야기라고 한다.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짧은 이야기 속에 많은 추억을 담고 있었다.

문화를 제조하는 문화제조창답게 많은 젊은이들이 오가는 모습이 반가웠다. 문화제조창은 ‘근로자의 땀방울이 예술인의 땀방울로’, ‘담배 연기는 문화의 향기’로 탈바꿈한 그야말로 추억을 피우는 공장이었다.

공연장을 나오면서 청주에 이런 문화제조창이 있다는 것이 참 뿌듯했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담배 공장. 지난 추억의 끝자락을 붙잡듯 본관 곳곳에 옛 건물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밖으로 나오자 밤하늘을 뚫을 듯한 굴뚝에서 문화의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다. 이왕이면 청주문화제조창에서 세계문화제조창으로 거듭나 청주 시민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문화제조창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추억을 피우는 공장에서 젊은 문화의 향기가 피어나는 것 같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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