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청주우편집중국장·수필가

어제일 같이 생생한 아버지와의 이별이 어느새 15주년을 맞았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던 시쳇말이 현실로 다가오지만 나의시계는 그날 그대로 멎고 있어 슬픔은 여전하고 일장춘몽의 단어만 맴돈다.

벚꽃이 만발했을 때 작고하여 벚꽃 필 때면 더욱 그립고 애잔하다. 떠나기 1주전 청주에 병원 갔다 무심천 벚꽃 구경하였고 열흘 뒤 상여 나갈 때는 미원천 벚꽃이 만발한 화창한 봄날이었다.

아버지는 빈농의 1남2여 외아들로 태어나 8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외아들로 태어나 격변기 어려움 속에서 7남1녀의 대가족을 건사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으로 평가 받을만하다. 본업은 농사였고 한때 우체국 집배원도 하고 우(牛)시장에 다녔다. 보은 내북 청천 청주 미원 장을 돌아가며 소를 사고팔았다. 당시는 무조건 걸어서 다녔는데 매일 몇 십리 밤길을 걸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어떤 날은 밤중에 도착하고 어떤 날은 아침에 소를 몰고 ‘이랴’ 하며 오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밤새 언제 오나 숨죽여 기다리다 아버지 ‘이랴’소리 듣고 대문으로 달려 나가며 고생한 남편 무사귀환을 반갑게 맞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를 낮에 일찍 사면 밤에 오고 저녁때 사면 인근 주막에서 한숨 자고 새벽시간대 출발하여 아침에 도착하는 거였다. 아버지의 고생을 잘 알기에 보은 근무 시 우선적으로 우(牛)시장을 찾아 아버지의 흔적을 뒤적이며 흠모했었다.

매일 밤길을 걷다보니 위험한 상황도 많았는데 산중에서 산 짐승 만나는 건 예사였고 홍수로 급류에 떠내려가다 구사일생 헤엄쳐 나왔다는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있다. 아버지가 우편집배원 생활을 한 인연 때문에 우체국에 근무한 걸 천직으로 알고 보람차게 봉직했고 당신도 흐뭇하고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는 87세의 일기로 격동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는데 어머니를 11년 먼저 보내고 홀로 시골에서 외롭게 지내다 가셨다.

가실 때는 고생 안하고 편안히 돌아가셨는데 임종 전날은 토요일로 전 가족이 못자리 만드느라 모여 자연스런 마지막 이별행사를 했다. 못자리 끝나고 오후에 아버지 몸 상태가 달라 보여 청주로 나가 병원에 가자 하니까 안 나간다며 모두 나가고 하나만 남으라 했다. 그러자 큰형님이 남는다고 했지만 큰형은 평일에도 자주 아버지와 함께 해서 다음날 출근 안 해도 되기 때문에 필자가 남기로 했다.

밤에 옆에 나란히 누워 ‘가정이 화목하려면 들어온 사람이 잘해야 하는데 당신 일곱 며느리들 다 착해서 걱정 없다’고 편안해 하셨다.

밤에 아버지 몸 상태가 심상찮아 내일 병원에 가자고 하니까 가려면 목욕하고 가야 한다고 하여 아침 임종 2시간 전 목욕을 손수 했다.

목욕 후 방에 눕혀드리고 주방에서 병원 갈 준비하는 사이 큰형님의 전화를 받으셨는데 나중에 보니 그때가 임종 30분전으로 이승의 마지막 하직인사를 큰아들에게 한 것으로 해석된다.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방에 들어가 이것저것 준비하다 조용하여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온몸에 힘을 주고 있어 아차 하는 마음에 아버지! 하고 부르니 처음에 ‘으음’ 하더니만 이내 곧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어두운 시절 태어나 전쟁과 빈곤 속에 갖은고생 다하며 8남매 자식 가르치고 천국 갈 땐 미원천 벚꽃이 만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환송 받으며 바람처럼 훨훨 날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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