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바야흐로 흠뻑 무르익은 봄이다. 이맘때면 도로변 가로수에는 하얀 눈이 내린 것처럼 아름다운 벚꽃이 장관을 이룬다. 벚꽃길로 이어지는 무심천에서부터 정하동 미호천변을 지나 북이면 신대리까지 40여분 동안 벚꽃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한다. 며칠 동안만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놓칠세라 퇴근길에도 이 꽃길로 들어선다.

마침 라디오에서 장범준의 ‘벚꽃 엔딩’ 노래도 덩달아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대에게 벚꽃을 보러 가자고 똑똑 문을 두드리면 그대가 나올 것 같은 멜로디가 기분 좋다. ‘벚꽃 엔딩’ 노래만 들려와도 지난날의 즐거운 순간들이 떠 올라 미소짓게 된다.

벚꽃을 두고 ‘요절한 시인의 짧은 생애’라고 했던 김영월, ‘나른하게 드러누운 저 고야의 마야부인 같다’라던 박이화도, 시인들은 이 아름다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문득 권도중 시인의 ‘벚꽃’도 애틋하게 다가온다.

잿빛 날들 지나와/어느새 아득한 곳으로 만개하여온 하늘 가득하다 못해/치마폭 내리듯/먼 하늘 아래로 지다아직도 옥양목 빨래 같은 빛으로 살아/목피 속 가득 감추어 흘러와

희게 베어 나오는 가지마다/살 속에까지 번져 있는 벚꽃 물들임이여 너의 마음 이렇게/벚꽃으로 오는구나.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봄밤에도 사람들은 가로등을 빛을 빌려 꽃구름 아래 셔터를 눌러대며 젊음을 핑크빛으로 물들인다. 이 꽃이 오래 버텨줘야 연인들의 꽃 핀 얼굴도 길어질 것이다.

일각에서는 일제 잔재인 벚꽃축제 명칭을 봄꽃축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해방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문화통치 수단으로 벚꽃을 창경궁에 심고 강제로 구경하게 했던 가슴 아픈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며 벚꽃을 뽑아내고 그곳에 무궁화 나무를 심자고 한다. 어르신의 회초리에 혼쭐이 나도 벚꽃은 매번 다시 핀다. 뒤돌아선 마음이 이번에는 반갑게 맞아줄까,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숨어서 피어나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애증과 연민 속에서도 국경을 초월한 아름다움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무심천 물줄기를 따라 흐드러지게 천변을 뒤덮는 저 꽃구름 송이를 보면 옹졸했던 내 삶의 태도도 바꿔 놓는다. 이 순간만큼은 걱정도 근심도 오롯이 꽃으로 피어나 얼굴에 심폐소생 한다.

아쉽게도 이번 주말에 애꿎은 비 소식이 있다. 벚꽃이 피고 나면 여지없이 봄비가 내린다. 꽃잎이 낙하하는 것만큼 아쉬운 일은 없다. 이 봄비가 오래 참아주길 바라지만 꽃이 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비우면 새로운 것이 채워지게 마련이다. 꽃잎을 떨구고 나면 싱그러운 초록 새순이 이 나무를 채울 것이다. 매 계절 비우고 채우는 일은 벚꽃만이 아니다. 피고 지는 건 사람도 다를 바 없다. 내게도 지난 힘든 전에 것은 비우고 새로운 희망을 담으며 하루를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4월의 벚꽃은 ‘ending’을 ‘and’로 도심에서 산기슭으로 퍼지는 벚꽃을 따라 이 나이에도 연(鳶)이 되어 따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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