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성문영 공은 1947년 12월 14일에 입산(죽음의 활터 식 표현)합니다. 한밤중 귀가하다 방공호를 헛디뎌 다리를 다쳤는데, 그것이 결핵성 질병으로 합병증을 일으켜 갑자기 임종을 맞이한 것입니다. 활쏘기와 함께 한 성 공의 1940년대는 가장 힘들었을 시기였습니다. 1940년대로 접어들면 사실상 활쏘기 대회가 힘들어집니다. 놋숟가락까지 공물로 걷어가던 시절이었으니, 무소뿔을 구해다가 각궁을 만든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거니와, 그런 조건이 아니더라도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치르느라 국내의 모든 단체 활동을 중단시킵니다. 이렇게 살벌한 정국에서 성 공은 활터에 나가서 몇몇 사원들과 활을 쏘는 조용한 칩거를 하다가 해방을 맞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건설되는 나라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단체의 임시 의장을 몇 군데 맡다가 모두 내려놓고 다시 활터로 돌아옵니다.

그래도 이 시기에 성 공은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느지막이 얻은 아들이 전국의 엘리트들만 가는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고, 비록 일제 패망 직전의 살벌한 시기였지만, 1944년에는 활터 사원들이 마련해준 집궁회갑도 간소하게 치렀습니다. 그날의 사진을 아들 성낙인이 직접 찍어주었으니, 7순에 접어든 노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큰 행복을 맛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조국의 통일을 바라며 입산했다는 것입니다. 3년을 더 살았다면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더 큰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남쪽으로 몰래 도망간 정부가 내팽개친 백성들은 인공의 서울 통치하에서 눈치를 보며 지냈습니다. 그때 미처 피난하지 못한 성낙인도 여전히 학교에 나갔고, 학교에서는 날마다 인민군 지원을 독려하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어느 날 아침 학교 가자고 찾아온 학생회 간부와 함께 집을 나서려다가 갑자기 똥이 마려워서 먼저 가라고 하고 뒷간에 들어갑니다. 그 사이에 인민군 자원 행사는 끝이 나고 성낙인은 다행히 그 자리에 없던 바람에 징집을 모면합니다. 인민군 자원을 앞장서서 독려하던 그 공산당 앞잡이 학생 간부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다음 집회 때 또 나서서 인민군 자원을 외치며 자신은 쏙 빠지곤 했다며 성낙인 옹은 분개했습니다.

성낙인은 나중에 미군 부대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며 한국전쟁을 보냅니다.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학교에 계속 다녔고, 그 뒤로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진 전공 교수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어지러운 과정에서도 활 관련 자료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황학정에서 큰 변화가 옵니다. 즉 김집 접장이 황학정 임원을 맡으면서 황학정 국궁 교실에서 쓰는 국궁 교재를 내고 황학정의 역사를 정리한 『황학정 백년사』를 발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자 성낙인 옹은 자신이 갖고 있던 자료를 몇 가지 김집 접장에게 내주어 황학정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힘을 보탭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황학정기』 원본을 복사해주어서 황학정의 유래를 확실히 알게 해준 것이 그런 일입니다. 이 황학정기는 그대로 복원되어 현재 황학정 건물에 걸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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