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문화공간 바르도 대표

 

[충청매일] 명리학(命理學) 또는 사주학이란 천간 열 글자와 지지 12글자를 사람들이 태어난 연월일시에 연주, 월주, 일주, 시주라는 네 기둥에 각각 두 글자를 배속하고 글자에 나타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배합을 통해 개인의 운명을 예측하는 학문을 말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주역(周易)에 의한 음양설이 먼저 존재했고,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으로 태양계의 영향을 받은 오행성으로 운명을 예측하는 오행설이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연월일시의 간지를 가지고 대운과 세운 이라는 운을 설정해 사람들의 운명을 감정하는 학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인 오대의 서자평이란 분이 시조이다. 물론 그 이전, 즉 오천 년 전에 명리학이 시작되 주나라, 은나라를 거져 당나라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우리나라에 명리학이 언제 들어 왔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고려시대 들어와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잡과라는 시험에 한 한 과목으로 선정되어 시험을 치렀다는 기록은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강 이석영 선생이 펴낸 사주첩경과 도계 박재완 선생이 저술한 명리요강과 명리사전 그리고 기타 명리학자들이 저술한 책들이 있다.

그럼 이렇게 오랜 역사와 저서들이 있는 현대에 들어와 왜 한의학처럼 명리학은 제도권 안으로 들어와 체계적으로 학문의 틀을 잡지 못하고 음지의 학문이 되었을까? 한의학 역시 동양 오술(五術) 중 하나인데 한의학은 정식 대학도 있고 병원도 있는 명리학은 그렇지 못하다. 이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명리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됐을 때 이는 주로 왕실에서만 활용되었다. 즉 왕의 즉위라든지 왕손의 택일 등 국정을 논하는 데 주로 사용 되어져 왔고 일반 서민들은 접하기 어려웠던 학문이다. 그러다 당사주라는 것이 서민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해 일반인들에게도 사주팔자라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를 무속인들과 절에서 활용하기 시작했다. 당사주란 사람들이 태어난 연도의 띠를 가지고 한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던 일종의 점학 이었다. 무속인들은 신점과 이 당사주를 이용해 나름대로 일반인들의 대소사나 질병, 궁합 등을 봐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사주로 사람들의 사건 사고나 길흉화복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서 미신으로 치부되어 음지의 학문이 되었 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스님들이 사람들의 사주를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오랜 옛날부터 불교국가였다. 예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한 절이나 암자를 다니면서 불공을 드리고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이때 스님들이 사람들의 신수나 사주를 봐주곤 하였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믿고 따랐다. 그러나 스님들이 예언했던 말들이 대부분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 맞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명리학이 제도권 밖으로 나와 체계적인 학문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무속인들과 스님들의 역할이 크다. 이는 또 명리학과 점학(점성술)과 구분하지 못한 점도 크다. 현재는 동양학이란 과정으로 몇몇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으로 정식과목으로 진행되고 있고 많은 젊은 학도들도 공부하고 있다. 명리학(사주학)이 양지의 학문으로 나와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점(占)이 아니라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매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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