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충청매일] 신소설 ‘혈의누’는 1906년에 발표된 이인직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원문을 들여다보면, 띄어쓰기가 되었는데, ‘독립신문’과도 조금 다릅니다. 독립신문은 오늘날의 띄어쓰기와 비슷한데, ‘혈의누’의 띄어쓰기는 오늘날의 띄어쓰기보다 좀 더 깁니다.

일청젼쟝의 총소리난 평양일경이 떠나가는듯하더니 그 총쇼리가 긋치매 사람의자취는 끄너지고 산과들에 비린티끌뿐이라

평양성의모란봉에 떨어지는저녁빗은 뒤엿뉘엿넘어가는데 저햇빗을붙드러매고시푼마음에 붓드러매지는못하고 숨이턱에단드시 갈팡질팡하는 한부인이나히 삼십이되락말락하고 얼골은분을따고넌드시 힌 얼골이나인정업시 뜨겁게나리쪼히는가을볏에 얼골이익어서 션앵도빗이되고 거름거리는 허동지동하는디 옷은흘러나려서 젖가슴이다드러나고 치마자락은따헤질질껄려셔 거름을걷는대로 치마가발피니 그부인은아무리 급한거름거리를 하더래도 멀리가지도못하고 허동거리기만한다

오늘날 우리는 책을 읽을 때, 눈으로 읽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눈으로 읽지 않았느냐고요? 그렇습니다. 옛사람들은 책을 입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옛사람들은 이 신소설 ‘혈의누’를 읽을 때 눈으로 읽은 게 아니라 소리 내어 읽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띄어쓰기는 글을 눈이 아닌 입으로 읽을 때의 숨쉬기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거슬러가서 조선시대에는 춘향전 같은 소설을 읽어주는 일로 직업을 삼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잣집에서 부르면 달려가서 읽어주고 품삯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을 전기수라고 합니다. 예컨대, 어느 양반집 마님이 전기수를 부르면 전기수는 달려가서 마루에 앉습니다. 발을 드리워 가린 안방에는 그 집안의 모든 아녀자가 모여있습니다. 전기수는 그 밖에 앉아서 춘향전을 펴놓고 읽는 것이지요. 그냥 낭독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넣어가면서 혼자서 연기하듯이 읽는 겁니다. 얼마나 감정이 북받치게 읽었는지, 어느 약방에서는 그 소리를 듣던 사람이 흥분한 나머지 전기수를 약재 자르는 작두로 찔러죽였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 아마도 판소리는 이런 과정에서 나온 소리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중학교 때부터 삼국지를 읽었는데, 처음 판본이 월탄 박종화의 5권짜리 삼국지였습니다. 그 뒤로 여러 소설가가 번역한 삼국지를 읽었는데, 그 이후의 삼국지가 월탄의 삼국지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뭐냐면 월탄의 삼국지는 읽기가 편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삼국지는 오래 읽으면 머리가 아프죠. 그거 눈으로만 읽어서 그런 겁니다. 월탄 박종화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활동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소설을 쓰지만, 그 소설 속의 문장에는 읽는 사람의 호흡이 남아있던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현진건의 ‘빈처’나, ‘운수 좋은 날’ 같은 소설을 읽다보면 편안하게 읽힙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소설가들이 쓰는 소설을 읽어보십시오. 머리에서 쥐가 납니다. 이게 바로 문장에 호흡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리내어 읽은 세대와 눈으로만 읽는 세대가 쓰는 문장은 완전히 다릅니다.

‘독립신문’의 띄어쓰기는 어절별이어서 오늘날의 띄어쓰기와 원리상 같지만, ‘혈의누’의 띄어쓰기는 호흡의 길이와 맞아서 요즘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독립신문’보다는 ‘혈의누’의 띄어쓰기가 우리 겨레의 체질에 더 가까운 띄어쓰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요즘 띄어쓰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데는, 그것이 인도유럽어의 틀을 우리말에 갖다붙인 것이라는 점도 있지만, 오늘날의 띄어쓰기가 글을 읽을 때 읽는 이의 숨결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절이 아니라 구절별로 띄어쓰기를 하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문장은 눈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실제로 국어 시간에는 소리 내어 읽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면 그 소리내어읽기할 때의 가락으로 길이로 띄어쓰기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뜻밖에도 그 길이의 적절한 사례를 신소설에서 만납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