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1910년 한일 강제합병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도 사람들의 일상은 계속됩니다. 단옷날이 되면 바쁜 농사 준비를 잠시 쉬고 동네마다 한바탕 잔치를 벌입니다. 여자들은 그네타기와 창포물에 머리 감으러 여기저기 몰려가고, 사내들은 씨름과 활쏘기 윷놀이를 하러 읍내나 큰 동네로 달려갑니다. 나라는 망했지만, 사람들의 세시 풍속은 몇천 년째 이어집니다. 3·1운동의 여파로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이런 소식들이 각 지역에서 올라옵니다. 활쏘기 대회 소식은 두 신문의 지역 소식 중에서 가장 많이 올라옵니다. 각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식이 활쏘기 대회였습니다.

이런 기록은 두 신문이 발간되기 이전에도 활쏘기는 다른 여러 세시풍속과 함께 계속 이어져 왔음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중앙 경기단체의 출현은 다른 스포츠에 비해 아주 늦어집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다른 스포츠들이 1910년대 후반부터 중앙조직이 만들어진 데 반해 활쏘기는 1928년에야 조선궁술연구회가 나타납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체육학계에서 따로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만, 제 짐작으로는, 사계의 지배를 받는 활터의 구조에서 스포츠로 거듭나는데 지역 사회 인사들의 관심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거나 조선궁술연구회는 1년 뒤에 ‘조선의 궁술’을 간행하고, 1932년에 ‘조선궁도회’로 재출범합니다. ‘조선의 궁술’을 통해 조선 시대 내내 주요 무기였던 활쏘기를 근대스포츠의 개념으로 환골탈태시키고, 조선궁도회라는 조직을 통해 명실상부 스포츠 단체로 거듭난 것입니다. 당시 활쏘기는 민속놀이의 형태로 남아 점차 사행성이나 단순 오락으로 전락할 위험이 컸습니다. 이런 위험을 방지하는 일이 스포츠로 조명하는 일인데, 그 과업을 조선궁술연구회는 아주 잘 수행한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수천년의 전통을 이은 우리 활쏘기는 근대 스포츠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과정을 주도한 인물이 성문영 공입니다.

‘조선의 궁술’은 옛날 방식으로 만든 책입니다. 활자로 마치 족보를 찍듯이 찍어서 오른쪽 가장자리에 구멍을 다섯 개 내어 끈으로 엮어 만든 책입니다. 종이의 질은 썩 좋지는 않아서, 한지가 아니라 당시 많이 쓰던 종이였습니다. 그런데 겉장은 제법 공을 들인 듯합니다. 빳빳하기도 하거니와 단단한 질감이 느껴져서 당시에는 양장본처럼 만들려는 뜻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문제가 될 줄은 그 당시에는 몰랐을 것입니다. 올해가 2019년이니, 벌써 90년 전에 나온 책입니다. 속의 종이들은 아직 멀쩡한데 그 단단했던 겉장은 부스러지기 시작해서 저에게 넘어온 성문영 공의 손때가 묻은 ‘조선의 궁술’은 귀퉁이 한 부분이 종이의 결대로 조금 떨어져나간 상태였습니다.

몇년 전에 KBS-TV에서 설 특집으로 활쏘기에 대해 찍는다며 저에게 협조 요청을 해왔습니다. 이것저것 자문해주었는데, 담당피디가 ‘조선의 궁술’을 화면에 담고 싶다며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 순간 정말 많이 갈등했습니다. 이 요구가 어떤 불행을 가져올지 익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간절한 요구 때문에 설마 하고는 빌려주었습니다. 몇 번 채근 끝에 6달만에 돌아온 ‘조선의 궁술’은 표지가 반 넘어 부스러진 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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