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볼링을 치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만큼 했으면 어디 가서 못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건만 내가 속한 클럽에서 나는 늘 꼴찌다. 매번 희망을 걸어보지만 역시 꼴찌다. 남들보다 연습량이 부족했다며 핑계가 늘수록 나는 점점 초라해진다.

SNS에서 영상을 보았다.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는 꼴찌가 일등 하는 아이와 ‘한 달 살기’를 하면서 그 변화를 관찰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끈다는 내용이었다.

꼴찌는 일등의 일거수일투족을 직접 보고 배우기 위해 일등 하는 아이의 반으로 갔다. 아차 싶었다. 왜 꼴찌를 일등한테 보냈을까? 일등이 꼴찌에게 가는 방법은 없었을까?

제작진의 의도대로 따라가는 꼴찌의 힘겨운 상황이 안타까웠다. 중간에 좌절도 하고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꼴찌는 나름 굉장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도 인정받고 싶다 했다.

그림을 좋아하는 꼴찌는 중학교 때 이미 낮은 성적 때문에 자신의 진로를 포기해야 했다. 일등과 한 달을 함께 하며 꼴찌는 성적이 조금 올랐다고는 하지만 그가 받았을 스트레스에 내 마음이 아팠다. 왜 수학 문제 하나 더 잘 풀면 빨간 동그라미를 얹어주면서 꼴찌가 그린 멋진 그림은 스케치북 속에서 잠을 자고 있어야 하는가. 성적에 밀려 자신의 재능을 묻어버려야 하는 꼴찌는 꼴찌가 아니었다. 그림은 일등도 부러워할 만큼 잘 그렸다. 꼴찌의 행복 그릇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학습 상담을 할 때면 늘 겪는 일이다. 처음 상담하러 온 학부모는 성적을 올리고 싶어 애가 타는데 아이는 옆에서 자포자기한 듯 무심히 앉아있다. 그런 아이의 태도에 엄마는 더 애가 탄다.

학부모를 보내고 아이와 따로 이야기를 해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엄마보다 아이가 더 간절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이 무슨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안타깝다. 아이가 정말로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것은 대개 엄마의 관심 밖에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성적이 좋은 아이와 안 좋은 아이가 함께 어울리는 일은 흔치 않았다.

반장도 공부 잘하는 아이가 했고 그런 아이가 모든 일에 돋보였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예전과 다른 것 같다. 꼴찌와 일등이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꼴찌가 반장을 하기도 한다.

지호는 게임을 잘하고 또 예린이는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저희끼리는 잘 안다. 그리고 그런 아이에게 열광하며 부러워한다. 저마다의 성실함과 노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다양하다면 꼴찌도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저마다 행복 그릇은 모양도 크기도 다르니 하는 말이다.

볼링은 꼴찌라도 다른 것은 더 잘하지 않겠냐는 동호회원들의 따뜻한 응원 덕분에 매번 즐거운 마음으로 볼링장을 찾는다.

꼴찌여, 당당하라! 꼴찌와 일등 사이는 먼 것이 아니다. 어디든 꼴찌는 있지만 그가 어디서나 꼴찌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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