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1938년 새해를 맞아 조선일보에서는 신년 특집으로 활쏘기를 다루고, 그 주인공으로 성문영 황학정 사두의 특별대담을 싣습니다. 거기에는 지금은 국궁계에 익히 알려진 만작 궁체의 상반신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내용은 우리나라가 활쏘기로 유명한데, 오늘날 활쏘기는 묵은 향기를 지닌 채 스포츠로 많은 사람이 즐기고 있다는 것과, 그렇게 된 과정을 성 사두의 입을 통해서 들어본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바로 덕국 친왕 하인리히가 등장합니다.

당시 독일의 황제는 빌헬름 2세였고, 이 황제의 동생이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하인리히였습니다. 하인리히는 동아함대사령관(중장)으로 중국에 머물렀고, 이때 대한제국의 초청을 받아 방문한 것입니다. 대한제국 시기 가장 높은 직위의 국빈방문이었고, 얼마 안 되어 나라가 망하기 때문에 대한제국 외교사에서는 가장 빛나는 사건이었습니다. 기해년인 1899년 6월 8일 인천 제물포항에 독일 군함을 타고 도착했고, 6월 11일(일) 오후 3시 하인리히 황태자는 이재순 민영환의 안내로 경복궁을 구경합니다. 이렇게 하기 전에 하인리히는 고종황제에게 좀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조선 고유의 무술을 보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활쏘기가 무과에서 폐지된 후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5년만인 1899년에 국빈 방문한 황태자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고종황제는 장안의 다섯 궁사를 궁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는 독일 황태자가 보는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데, 오랜만에 활을 쏘는 사람들인데도 150미터 밖의 과녁을 땅땅 맞히는 것을 보고 하인리히 황태자가 크게 감동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활을 들고 직접 쏩니다. 맞을 리가 없지요. 제 짐작으로는 틀림없이 시위에 팔뚝이 맞아서 퍼렇게 멍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황태자는 군인이어서 도전정신이 있었는지 드디어 50시째 한 발을 맞히고야 맙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황태자 앞에서 시범을 보인 5명 중에 성문영 공이 포함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다섯 명이 누구인지는 지금 알 수 없습니다. 조선일보 대담에서 성문영 공은 바로 이 날의 사건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전하기를, 덕국 친왕이 다른 행사에서는 불과 5분 내외로만 머물렀는데, 이날은 반나절이나 활쏘기 구경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7시에 하인리히 친왕은 독일총영사관에서 재한 독일인들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전인 오후 3시와 7시 사이, 즉 3~4시간 정도를 활쏘기 구경을 하고 자신이 직접 쏘아보기도 한 것입니다. 게다가 하인리히 친왕이 고종황제에게 아주 의미 깊은 말을 하고 갑니다.

“총을 맞으면 사람이 죽지만, 화살 맞은 사람은 안 죽어 누군가 부축해야 하니, 활쏘기는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데 2배의 효과가 있다.”

한국의 활쏘기를 칭찬한 것인데, 이 일을 보고 들은 고종황제는 크게 감동하여, 마침내 윤음(임금의 지시)을 내립니다.

“활쏘기가 비록 무과에서는 제외되었지만, 백성의 체육을 위해서 중요하니, 활터를 세워 권장하라.”

그리고 경희궁 북쪽 담장을 헐어서 활터를 세우고 누구나 와서 쏠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황학정입니다. 이 사건 후 전국에 활터가 우후죽순으로 다시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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