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퇴직을 하고 전원주택을 꿈꾸어 오던 고향 친구가 드디어 조용한 산기슭에 집을 마련했다. 어릴 적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림 같은 전원에서 여유롭고 행복한 나만의 주택을 짓고 여유를 만끽하며 노후를 보내고 싶은 꿈을 이룬 것이다. 지난 일 년 동안 서울을 오가며 지은 주택은 길고 긴 직장생활을 마친 자신에게 주는 큰 선물이자 보상이었다.

알싸한 겨울 찬바람이 두꺼운 패딩을 파고드는 토요일 오후, 고향 친구들과 함께 그가 안내한 주택 마당에 들어섰다.

직장 일로 아내가 내려 오지 않은 주택에 초등학교 여자 친구 셋이 모였다. 모처럼 손님을 맞는 남자친구는 들뜬 마음에 말이 많아졌다. “너희가 알아서 챙겨 먹어라” 이 말 한마디에 곰솥 같은 여자 친구들이 주인을 내치고 내 집인 양 이곳저곳을 살피며 주인 행세를 했다. 집 구경을 마친 우리에게 이곳 이장에게 선물로 받았다며 친구는 투박한 손으로 토종꿀을 꺼내 놓았다. 꿀차를 마시며 이 집을 설계하면서부터 완성하기까지 신축 과정을 낱낱이 설명하는 친구는 여유로운 생활을 맘껏 즐길 일만 남아 보였다.

무엇보다도 이 집이 마음에 든 것은 드넓은 배란다 창이었다. 정면으로 산새가 아름다운 뷰가 한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정원에는 잔디밭과 담장을 대신한 편백 나무, 반송, 소나무가 멋스럽다. 담장을 끼고 아직은 회초리 같은 반려목이 뿌리 깊은 나무가 되려면 족히 십여 년은 지나야 할 것 같았다.

옛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있을 때 뜻밖에 반가운 겨울 손님이 찾아왔다. 온종일 참고 있던 찌푸린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목화송이 같은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는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처럼 반가워했다. 때맞춰 내리는 눈을 보자 안개같이 퍼지는 아득한 옛날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이면 밖은 오히려 고요했다. 소창을 통해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공연히 가슴이 설레였다. 눈이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바깥출입은 엄두를 못 냈다. 다행히 함박눈은 겨울 방학 때 많이 내렸다. 이렇게 폭설이 계속 내릴 때면 동화책에 푹 빠져 살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안데르센 동화집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라비안나이트’ 천일야화는 호기심 많은 나를 잠재우지 않았다.

하얀 눈은 가려야 할 일 많고 덮어야 할 것 많은 이 풍진 세상을 모두 덮어 버린다. 각 처에서 부지런히 살아온 친구들, 풍족하진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뿌리 깊은 나무처럼 안식과 흔들림이 없다. 강물과 같은 친구들이다. 강물은 절대 산을 넘을 수 없지만, 그 산을 품고 굽이굽이 돌아 만나듯이 순리에 역행하지 않고 지고지순하게 살아온 친구들이다. 그저, 주는 만큼 받고 받은 만큼보다 더 주려고 하는 친구들이기에 그들 앞에 서면 서로가 무장 해제된다.

그 소녀 소년들이 이제 은퇴를 하고 은발 머리로 다시 노년의 들판을 걸어간다. 몸은 무성했던 잎이 된서리를 맞은 듯 시들하지만, 백발이며 주름도 무심해지는 나이가 오히려 향기가 난다. 빛을 감춘 원석들이 저마다 보석으로 가공되어 오래도록 빛을 내는 초로의 친구들은 안데르센 동화와 같은 영혼 불멸의 믿음이 있다. 겨울 손님을 맞이한 전원주택은 직선으로 지어진 지붕 위에 둥글게 쌓이고 우리의 정도 둥글게 쌓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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