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공자도 맹자도 활쏘기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했고, 실제로 활쏘기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유교 문화권에서는 활쏘기가 신분 질서를 드러내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왕은 대사례와 궁중 연사를 하여 군신 간의 질서를 확인하는 절차로 여겼고, 지방에서는 향사례를 행하여 관리와 지역주민이 장유의 질서를 배우는 형식으로 실시하였습니다. ‘국조오례의’에는 개성지방에서 행해지는 향사례를 본보기로 기록해 두기도 하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지역마다 향사당이라는 것이 들어섰습니다. 말을 보면 향사례를 행하는 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관청과 연관이 있고, 지역 사람들이 관청과 연락하는 통로 노릇을 하는 곳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향사는 활쏘기라는 말이지만, 실제로 활쏘기가 행해진다는 뜻이기보다는 향사례라는 의식절차를 통해서 장유의 질서를 확인한다는 뜻이 더 강합니다. 그래서 향사당의 할 일은 활쏘기보다는 미풍양속을 기른다는 뜻이 더 강합니다.

향사당은 자연히 관청 인사들의 출입이 잦고 지역 유지들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무과가 있던 시절에는 지역 발전을 위한 모든 논의가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것이고, 활쏘기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 증거들이 지역의 활터에 간간이 남은 경우를 볼 수도 있습니다. 부안 심고정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부안 심고정의 경우는 순조 7년(1807) 향사당에서 출발합니다. 헌종 6년(1840)에는 이름이 관덕정(觀德亭)으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 좀 더 활쏘기에 충실한 용도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69년(고종 6년)까지 계속되어 오다가 이 뒤로부터 건물이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면서 향사당이 없어졌고, 1892년(고종 29년) 상소산(上蘇山) 아래 초가로 사정을 새로 창건하여 유지해오다가, 1929년 여러 사람이 기금을 마련 서림(西林)에 새 정을 짓고 심고정(審固亭)이라 하였는데, 1943년 일제의 신사를 건립하면서 철거되었다가 1966년 다시 재건되어 오늘에 이릅니다.(「남도 정자기행」:대한매일뉴스)

심고정의 경우를 감안하여, 활터의 변화를 살펴보면 크게 3차례 격변이 찾아옵니다.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활쏘기가 무과에서 사라진 것이 첫 번째 위기이고, 일제강점기하의 억압된 사회 분위기가 두 번째 위기이며, 한국 전쟁이 세 번째 위기입니다.

우리나라의 유서 깊은 활터를 보면 모두 이 세 시기에 격변을 맞습니다. 특히 활터 부지를 잃거나 관리를 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불연속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1920년대의 활터는 무과 후의 침체된 지역 분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롭게 출발하는 때이고,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때는 이런 활쏘기의 흔적이 거의 다 사라져 자료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결국, 한국 전쟁이 끝난 1950년대 말에 각 지역의 활쏘기가 다시 활성화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춰갑니다. 관덕이 스포츠로 대체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래된 활터마다 현재의 사두가 몇 대인지 정확히 셈하기 어려운 곳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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